삶의 고백/어쩌다 쓰는 일기

한미정상회담, 미국에게 보내는 희생제물 (2021.05.14)

도덕쌤 2021. 5. 16. 11:33

[한미정상회담, 미국에게 보내는 희생제물]

 

오늘 소성리 싸움은 그 동안과 양상이 매우 달랐다.

미국이 요구하는 대로 사드기지로 향하는 육로를 반대자들의 방해를 차단하고 항상 통행이 가능하도록 조치하겠다는 뜻을 보였다.

그 동안 헬기로 나르던 것들, 산길로 다니던 인부들, 그다지 긴급하거나 육로수송 외엔 다른 방법이 없는 물자나 장비들도 아닌데,

한 번에 모여서 이동하는 것도 아니고, 종일 해가 떠 있는 시간 동안 경찰들이 반대자들의 도로진입을 봉쇄하고, 아무 때든 통행이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이런 식으로 거의 매일(당분간은 주 2회) 경찰병력을 동원하여 길을 확보해주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적은 인원으로 농사일도 포기하고 이 싸움에만 매달려 있을 수 없으니, 새로운 싸움 방식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

오래전부터 각오한 결말을 예측할 수 없는 싸움을 할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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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3() 저녁시간

지킴이 활동 중에 경찰병력 교대가 이루어졌다. 평소와 다르게 인수인계가 이루어졌다. 어디서 온 병력들인지 묻고 싶었지만 그냥 넘어갔다.

성주경찰서 수사과 형사들이 다녀갔다. 4.28 싸움에서 선두차량을 향해 나사못을 뿌렸다고 군용물 손괴 미수와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수사한다고 출석요구서를 보내왔는데, 등기로 보내놓고 다시 직접 들고 온 것이다. 장로님께 무슨 말씀을 드리겠냐고 미안하다는 듯이 전해주고 돌아갔다.

국방부 쪽 행보관이 내려왔다. 이제 또 무얼 넣겠다고 또 한바탕 난리칠 때가 되어가는 것 같은데 이번엔 뭘 가지고 난리칠 것 같으냐, 도대체 무슨 공사를 하길래 매번 환경개선 공사라고 하느냐, 물었다. 행보관은 묻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제발 평화롭게 해결되면 좋겠다며 다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장로님도 안전을 먼저 챙기라는 충고만 하고 내려갔다. 얼굴빛이 슬퍼보였는데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다.

늦은 시간 장을 보고 오는 도중에 내일 아침 경찰병력과 함께 공사차량이 들어온다는 긴급 공지가 떴다.

돌아와 늦은 저녁을 먹고 자세히 알아보니 이제 1주일에 2회 계속 작전을 펼칠 거라는 얘기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경찰병력의 교대나 행보관의 슬픈 눈빛이 무얼 의미한 것인지 깨달았다.

 

* 5.14() 새벽

새벽 4시에 일어났다. 마당에는 평통사 회원들과 마을 주민들, 할매들이 나와 계셨다.

오늘은 어떻게 막아내야 할까?

20184월부터 9월까지 매일같이 출퇴근하는 공사인부와 자재 반입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제 다시 그런 상황을 맞이했다. 그때 우리는 아침기도회 후에 공사저지 평화행동을 시작했다. 출근하는 인부들과 경찰들을 향해 우리의 뜻을 알리고 사드 반대의 이유를 설명하는 교양교육을 한 뒤에 저항없이 들려나오는 방식으로 대응했었다. 기도회부터 평화행동까지 대략 1시간에서 1시간 반. 경찰들 입장에선 집회를 해산하는 절차를 밟더라도 어차피 그 정도 걸려야 하는 시간이니 그렇게 적절히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 공으로 성주경찰서 경비과장은 경북기동대 경비계장으로 영전해 갔었지?

다시 그렇게라도 우리의 목소리를 들려줘야 할 것 같았다. 진밭교에 올라가 아침기도회 준비를 했다.

그러나 처음 뒤쫓아왔던 열매님과 태령쌤 외에는 아무도 올라오지 못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차들을 경찰들이 차단했다. 원불교는 천막교당에서 두 분이 아침기도를 드리던 중이었는데 마치기를 기다려 어찌할 것인가 의논하려 했다. 그런데 결국 기도소 컨테이너 앞에서 전선이 만들어지고 말았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아침기도회 준비했던 것을 정리하고 기도소 앞으로 돌아왔다

손가락마디만한 굵기의 가냘픈 격자틀 안에 동지들이 들어앉아 있고, 할매들은 그 앞에 앉아 있었다. 대충 세어보니 채 30명도 안 되었다.

[안전지대]라는 시를 낳았던 4.28의 기억 때문에 이번엔 나도 격자틀 안에 들어가 앉기로 했다. 6시가 조금 넘자 진압이 시작되었다. 격자 밖에서 동지들을 챙겨주던 은학쌤이 제일 먼저 끌려나갔다. 오른쪽 끝에 들어있던 분들이 끌려나갔다. 내게로 경찰들이 달려들었다. 각지를 끼고 격자를 붙들고 있다가 앞에 있는 경찰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팔꿈치와 어깨 관절을 누르고 손가락을 꺾어 깍지를 풀어낸 경찰이 다리를 잡아 끌었다. 이제 아무것도 붙들게 없어 그냥 깍지를 끼고 온 몸에 힘을 주는데 뒤에서 겨드랑이로 손을 넣은 경찰들이 내 몸을 위로 잡아 끌었다. 그 사이 아무 것도 붙잡지 못한 채 깍지만 낀 채로 있던 내 손을 또 한 놈이 손가락을 꺾어 뒤로 젖혔다. 사지가 들린 채로 끌려 나왔다. 네 명의 경찰이 들었는데 버둥거리지도 않는 내 몸을 지탱하지 못했다. 한쪽 어깨가 쳐진 채로 비틀걸음으로 마당 앞에 내려놓고 갔다. 꺾였던 엄지손가락은 몇 시간 뒤 지속적인 통증을 느끼게 되었는데, 인대나 뼈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한다. 아직도 자판을 두드리거나 물건을 손에 쥐기가 불편한데 이 무슨 개같은 일이란 말인가?

왼쪽의 줄무늬 모자가 내 모습. 오른쪽 동지는 벌써 팔을 제압당해 있다.

 

* 5.14() 아침

컨테이너로 돌아와 약을 먹었다. 웬만하면 화장실 갈 일 자꾸 만드는 약은 싸움 끝난 뒤로 미루고 싶었지만, 약을 먹지 않고 싸우다가 탈진해서 위기에 빠진 경험을 여러 번 하다 보니 미리 먹어야겠단 생각을 했다.

더 늦기 전에 기록이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다시 기도소 컨테이너 지붕으로 올라가 페북 라이브를 시작했다. 격자는 거의 진압이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꼴통들 태극기부대 유투버가 올라와 촬영을 하고 있었다. 끌려나온 우리가 촬영을 하겠다고 들어가면 진입조차 허용 않는 경찰들이 보수유투버의 촬영은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항의를 받은 경찰들이 다가가 뒤로 물러나게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 사이 경찰들은 격자 앞의 할머니들도 일으켜 밀어냈다. 끝까지 목이 터져라 열변을 토하시는 교무님도 길 가장자리에 고착을 시켰다.

그렇게 길이 열리고 이제 공사차량이 들어가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평소 기지로 출근하던 차량들, 그 가운데는 우리가 출입을 허락한 차들도 있었고 우리가 막아서 다른 곳에 차를 세우고 걸어들어가던 차도 있었다. 1~2회 들어가는 쓰레기 수거차량도 있었다. 확실하게 알 수 없는 문제의 차량은 도로집회 시 무대용으로 가끔 이용하던 김천대책위원장의 화물차량과 같은 종류의 차, 카고트럭 한 대 뿐이었다. 이 차들이 띄엄띄엄 두 시간도 넘게 들어갔고, 그 사이에 경찰버스만 20대가 넘게 줄지어 들어갔다.

 

* 5.14() 오전

회관앞 도로는 경찰들이 몇 겹으로 두텁게 인의 장벽을 이루고 있었고, 지킴이활동가들은 장벽을 좀더 뒤로 배치하라며 싸우고 있었다. 수십대의 경찰버스가 들어가는 장면만 볼 수 있었을 뿐, 장비나 자재를 실어나르던 대형트럭이나 트레일러는 하나도 없었으니 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주민들은 격앙되고 있었다.

할매들이 용케 저지선을 뚫고 지휘본부로 쓰고 있는 골프장 시절 캐디숙소 앞 도로에 주저 앉았다. 차선 하나 차지하고 앉아 어떤 차가 들어가는지만 보자고 앉아계시니 할머니들을 다시 끌어내기가 민망했을 것이다.

카고 트럭이 들어간 후에도 별다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도 페북라이브 중계를 중단하고 내려와 주변상황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마을 안길로 나가 저수지-삼거리-홈실-용봉삼거리-보건소로 이어지는 코스로 크게 돌았다. 보건소입구 삼거리는 경찰버스가 서로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차가 엉켜 있었고 저수지 댐 위에서 바라보니 대략 20대 이상의 버스가 늘어서 있었다. 홈실쪽으로 나아가니 김천 활깃재 방향에서 경찰버스가 연이어 들어오고 있었다. 용봉으로 크게 돌아오는데 용봉삼거리에서 경찰이 검문을 했다.

이쪽에서도 경찰버스가 줄지어 들어가고 있다. 보건소앞을 통과하는데 엉킨 차들이 길을 열어줄 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기도소 컨테이너앞에 다시 차를 세우고 땡볕에 앉아 있는 할머니들에게 우산으로라도 그늘을 만들어 드리려 우산 두 개를 가져갔다.

부녀회장님이 김대령을 불러서 상황설명을 하게 해달라고 하셨다. 김대령의 얘기는 최대한 빨리 들어온 차량을 내보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그래서 오늘 이 상황을 좀더 일찍 마무리되도록 하겠다는, 그런 얘기였다. 하지만 오늘 작전이 어떤 목적으로 펼쳐진 작전인지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매일 일상적으로 이런 작전을 펼쳐나가는 문제에 대해서 그가 가진 재량권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할매들이 건네 준 피켓을 들고 할매들 옆에 앉아서 백날 얘기해봐야 그도 경찰 현장지휘관들도 이런 작전에선 재량권이 주어지지 않은 중간간부에 불과했다.

지리한 상황이 계속되던 중에 부녀회장님이 탈진으로 쓰러졌다. 구급차에 실려 떠나려는데 이곳에 남아서 더 지켜보겠다고 하는 회장님의 의지를 받아들여 도로 옆에서 안정을 취하기로 했다.

1120분쯤 할매들이 회관쪽으로 철수했다. 10분쯤 후 사드기지로 들어갔던 차량들 일부가 내려갔다.

 

* 5.14() 오후

회관앞 천막에서 김치와 오뎅조림으로 점심을 먹고 잠시 컨테이너에서 쉬고 있는데 주민대책위는 오늘 싸움을 정리하기로 했나보다. 정신차리고 나가니 벌써 정리집회는 끝나 있었다. 나중에 페북에서 집회 장면을 다시 보았다. “이 싸움은 옳고 그름의 문제이고, 명분을 우리가 가지고 있으니 언젠가는 사드에 가담했던 이들을 심판하고 우리가 이깁니다!” 이종희위원장님 말씀을 가슴에 담고 모였던 사람들이 돌아갔다.

그러나 회관앞은 물론 기지 정문에서 용봉삼거리에 이르는 도로, 특히 보건소앞에서부터 진밭교까지는 경찰들의 벽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백여 대에 이르는 차량들이 에어컨을 가동하느라 계속 공회전을 하여 매연을 뿜어대고 있었다.

잠시 쉬고 나니 꺾였던 엄지손가락이 아파 왔다. 보건소에 들렀는데 소장님이 없다. 그 앞에는 미국국가를 틀어대던 태극기부대가 설치고 있다.

차를 돌려 동영 쪽 과수원 옆 등산로 입구를 향했다. 내 차를 알아보고 경찰이 막아서더니 허형사가 동승한 뒤에야 길을 열어준다. 등산로 입구에 세워두던 차들이 오늘 기지까지 올라갔으니 역시 그곳엔 아무 것도 없다.

진밭교로 돌아와 지킴이초소로 방향을 틀었으나 차량진입 불허. 걸어서 민가까지 올라가 네시쯤 올라와 이곳에서 사진을 찍을 것이다 예고하고 내려왔다.

네시 알람을 듣고 차로 마을안길을 통해 민가까지 올라갔다. 허형사와 양형사가 올라왔다. 앞으로 죽이지 않고는 끌어낼 수 없는 방법을 찾아 막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 여기에 어떤 타협안이 있겠느냐 질문했지만, 이 친구들이 무슨 답을 할 수 있을까. 내려오는 차들을 사진을 찍었다. 동영에 세워두고 등산로로 출근하던 차량들과 쓰레기 수거차량 등이 내려갔다.

마을회관으로 오니 경찰버스들이 내려가고 있었다. 그 앞을 대여섯 명 주민들이 막아서면서 너희가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막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니냐 소리치고 있었다. 페북라이브를 열었다. 12분만에 다시 들려나오고 경찰들 내려가고, 마지막에 들어내던 경찰들 타고 갈 버스 내려오자 또 다시 길을 막고, 너희들도 애를 먹어봐야해! 봉정할매 지팡이를 휘두르며 내달리셨다. 정보과 형사들이 봉정할매를 달래고 차를 먼저 내려보낸 후 마지막 진압경찰이 걸어내려가 버스를 탔다.

 

갑자기 텅 빈 길. 새소리가 들려왔다. 이 평화를 누가 짓밟고 있는지...

미국과 미국의 개가 된 국방부와 미국의 입이 되어버린 언론과 우리 손으로 뽑아준 식민지관리인 문재인.

참 서글픈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