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백/고백 ; 기도 ; 선언 ; 설교 ; 묵상

제 상담자가 되어 주십시오.(마가교회현장예배 설교문 211031)

도덕쌤 2021. 10. 31. 17:33
마가교회 소성리 현장 예배 설교문(2021.10.31)
(오늘의 성서일과 = 시편 146편 , 룻기 1:1-18, 히브리서 9:11-14 , 마가복음 12:28-34)

장로 직분을 받고난 뒤, 목사님을 대신해서 설교(說敎)를 하게 되는 때가 가끔 생깁니다.
그러나 따로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어서 설교가 뭔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자신이 없습니다.

 

설교가 하느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거라면 성령의 감동으로 그저 입술만 빌려드리면 될 일이니, 성령의 감동을 구하기만 하면 되겠지요?
옛날 제가 써나갔던 글들을 다시 읽다보면 과연 성령의 감동을 받았었나 싶은 글들도 꽤 있어서 다행입니다. 특히 2014년 블로그에 오늘의 묵상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 썼던 글들은 내가 성령의 감동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얘기들을 써나갈 수 있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설교는 말씀을 준비하는 내내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한 채 시간만 허비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날도 많지 않겠습니까?
이런 때에는 성령의 감동으로 전하거나 가르치는 게(敎) 아니라, 나의 깨달음이나 나의 묵상 결과를 '나눈다, 발제를 한다'는 생각으로 얘기하려 애씁니다. 

하지만 깨달음이나 묵상의 결과가 쓸만한 것이라면 발제하는 것도 좋겠지만 함께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지 자신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오늘이 그런 날입니다. 

그러니 오늘 제 이야기는 그냥 넋두리로 들어주셔도 괜찮습니다.
깊은 절망에 빠진 제 얘기가 여러분을 함께 절망의 골짜기로 이끌어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늘 희망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이 여러분을 보내시어 제가 희망을 갖도록 이날을 준비하셨을지도 모릅니다. 
제 얘기가 상담을 받으로 온 내담자의 고백이 되고, 여러분은 제 얘기를 말없이 들어주는 상담자가 되어, 오늘 이 시간은 나의 아픔을 치유해주는 그런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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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느님을 언제나 나를 사랑하시는 분, 내게 희망을 주시는 분,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 내가 겪는 고난을 견디어 나갈 힘을 주시고, 고통 속에서 건져주실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한을 품고 죽어 귀신이 되어 당신의 한부터 풀어달라고 후손을 괴롭히는 조상신, 풍성한 제물로 치성을 드려야 소원을 들어주는 그런 신이 아니라, "너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하느님. 당연히 그런 하느님이 참된 나의 하느님이 아니겠습니까?

그 하느님이 가르쳐 주신 '바른 길'은 오늘 마가복음 말씀처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나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이 가르침이 바른 길임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는 절망에 빠지게 된 걸까요? 저도 믿음과 행함이 아직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데, 내가 내 몸을 아직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렇게 간단히 정리하면 좋겠지만, 이렇게 간단히 정리해 버리면 내가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요?

제가 절망에 빠진 것은 두 가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는 '기후 위기'에 관한 것이고, 하나는 '사드 철회에 대한 전망'이지요.

기후 위기에 대한 생각을 하던 중에 '생태발자국'이란 개념이 생각났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 산다면 지구가 몇 개쯤 필요할까?" 이게 '생태발자국'이란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의 질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활수준에는 두 개쯤 필요했고, 서구 유럽의 생활수준이라면 서너 개쯤 필요하다고 하더군요. 아마 일곱 개의 지구로도 부족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니까 우리 후손들이 쓸 몫까지도 빼앗아 미리 쓰고 있는 셈입니다. 핵발전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지지요. 에너지는 우리가 쓰고 후손들에게는 수십만 년 짊어지고 가야 할 쓰레기 폭탄을 넘겨주는 일이지요.
해결책은 "지구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삶"을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구가 두 개쯤 필요한 생활방식을 가진 여러분, 여러분은 "지구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아마 우리의 '지구 두 개가 필요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달이나 화성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개발하는 일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두 개의 지구를 마련하기 보다 인류를 절반으로 줄이는 일이 더 쉬운 일이라 생각하여 인류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는 전쟁과 학살을 선택했는지도 모르지요. 아니 다른 인간을 에너지원으로 잡아먹는 - 가축이 된 인간과 가축을 기르는 인간이 함께 사는 계급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도 한 방법이겠네요.
초대교회가 살아가던 방식 - 공산주의라는 사회체제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지구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삶"을 최선의 삶의 방식으로 삼고 있을까요?
저 역시 이미 익숙해진 '두 개의 지구를 필요로 하는 삶의 방식'에서 '하나로 충분한 삶'으로 되돌아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처음부터 '하나로 충분한 삶'은 살아보지 못했으니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는 일이겠네요.)
그러니 인류 모두가 "지구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삶"을 살아가자고 설득하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이제 사드 철회에 대한 전망이 어떻게 절망으로 나를 이끌었는지 얘기하겠습니다.
사실 이것은 기후위기에 관한 생각보다는 희망적입니다. 다만 시간의 문제일 뿐입니다.

사드가 전쟁무기이고 사드가 이 땅이 미국의 식민지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평화를 사랑하는 이 땅의 사람들이 결국은 사드를 몰아내고 미군을 몰아내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그 때가 언제쯤일까요? 
당장 일상적인 통행로 확보를 목표로 일주일에 두 번씩 국가폭력 경찰을 동원하여 짓밟고 있는데,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출석요구서를 남발하고 의법조치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는데, 언제까지 우리는 이런 모양으로 싸워야 하는 걸까요?
"사드 빼는 그날까진 죽어도 못 죽는다!" 소리높여 외치는 소성리 할매들이지만, 할매들이 과연 그날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을까요?

군용물 손괴 미수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또 일반교통방해 혐의로 조사하겠다는 출석요구서를 받았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도 벅찬데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경찰을 동원해서 길을 열라고 미군들이 요구하고 있답니다. 지금도 미군 번호판을 단 차량들이 연일 들락거리고 있어 열불이 터지는데, 적어도 성전정화 사건 만큼의 퍼포먼스는 해야하지 않을까요?
미군과 그 하수인 경찰들은 그 퍼포먼스를 계기로 십자가 형틀을 준비하지 않을까요?

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싸움을 이길 때까지 싸우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싸움을 이어갈 사람들이 줄이어 나타나겠습니까?
요즘 날마다 기도하는 내용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멀리서 그 땅을 바라보기만 했던 모세처럼, 소성리 할매들 사드가 물러가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불러가지 마옵소서! 사드 빼는 그날까진 죽어도 못 죽는다는 할매들의 기도를 들어주옵소서! 속히 이루어 주옵소서!" 이것입니다.
  

이 땅에 사드를 가져다 놓고 전쟁의 길을 강요하는 미군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지구의 갯수가 너무 많아서 인류의 대부분을 가축으로 길들이거나 죽여 없애는 방법을 선택하고, 우리를 그 도구로 삼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기에 절대복종하고 있는 이 나라 권력자들은 미국의 도구가 되어서라도 자신의 필요, 두 개의 지구를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꿈을 꾸고 있는 것이겠지요? 제 나라 동포들을 다 죽이거나 가축으로 길들여서라도 자신들 그룹만 그렇게 살 수 있기를 꿈꾸고 있을 것입니다.
해결책이 있을까요?

오늘은 종교개혁 기념주일이랍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말씀'으로 새롭게 되었던 교회가 오늘날 어떻게 타락해 있는지 보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여 돈을 버는 전쟁 장사, 무기 장사꾼들이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말씀'을 외치며 예수님의 이름을 팔고 있습니다.
일곱 개의 지구로도 부족한 삶을 영위하며 그것이 예수 잘 믿어 받은 축복이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들을 마지막 때에 나타날 거라고 말씀하신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적그리스도의 소굴이 되어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교회를 어떻게 개혁해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나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구원에 대하여, 은혜에 대하여, 영생에 대하여, ...... 전통적인 교리 속의 중요한 주제들에 대하여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때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사랑하신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이, "너, 나를 위해 죽어줄 수 있니?" 물어보고 계십니다.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너, 나를 위해 죽어줄 수 있니?" 물어보고 계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바로 이런 물음 아닙니까?
오늘 성서일과 중 시편 146편이 우리의 대답으로 삼기 적당할까요?
함께 다시 읽으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   할렐루야, 내 마음 야훼를 찬양하리라.
2   한평생 야훼를 찬양하리라. 이 목숨 있는 동안 수금 타며 하느님을 찬양하리라.
3   너희는 권력가들을 믿지 말아라. 사람은 너희를 구해 줄 수 없으니
4   숨 한번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 가고 그 때에는 모든 계획 사라진다.
5   복되어라, 야곱의 하느님께 도움받는 사람! 자기 하느님 야훼께 희망을 거는 사람!
6   하느님은 하늘과 땅, 바다와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 언제나 신의를 지키시고
7   억눌린 자들의 권익을 보호하시며, 굶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야훼는, 묶인 자들을 풀어 주신다.
8   야훼, 앞 못 보는 자들을 눈뜨게 하시고 야훼, 거꾸러진 자들을 일으켜 주시며 야훼, 의인을 사랑하신다.
9   야훼, 나그네를 보살피시고, 고아와 과부들을 붙들어 주시나 악인들의 길은 멸망으로 이끄신다.
10   야훼, 영원히 다스리시니 시온아, 네 하느님이 영원히 다스리신다.


※ 이 글은 새마갈노(http://www.eswn.kr)에도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