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백/어쩌다 쓰는 일기

자가격리위반으로 신고되어 조사를 받았다.ㅠㅠ

도덕쌤 2022. 4. 15. 01:20

((블로그에 마지막으로 일기를 쓴 지 한 달 보름. 그 사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글로 남길 틈도 없이 계속 벌어지는 일들 때문에 많은 생각들이 속으로 삼켜지기만 했다. 그래도 습작시 한 편(딱새와 거울)과 현장기도소의 보고서로 쓴 [군용물 손괴 미수라고 징역 2년?]이란 글이 있긴 하지만, 날숨은 없이 들숨만 쉬고 살아온 셈. 
대구마가교회 현장예배 설교를 부탁받았을 때 수락하지 못한 일이 못내 아쉬웠다. 

오늘의 일기는 먼저 지난번에 일기를 썼던 후에 있었던 일들을 정리해 두는 데서부터 시작해야겠다.

사순절 시작과 함께 사드기지 철조망 둘레를 걷는 '여리고 기도'를 계획했었다. 홀로 실행하는 것이어서 계획이 몇 차례 수정되어 진행되었고, 마지막엔 코로나 확진자가 되면서 중단되었다. 여리고 기도를 구상하며 품었던 생각들을 따로 정리하여 동지들에게 제안하고 싶었는데 언제쯤 하게 될지 모르겠다. 아무튼 3월 2일 미군숙소로 사용하던 옛골프장클럽하우스로부터 사드기지 정문까지 이르는 길고 험난한 코스(동영 방향)를 도는 것으로 여리고 기도를 시작했다.

3월 4일과 6일, 울진에서 일어난 큰 산불로 모두가 애를 태우던 그 때, 소성리에도 산불이 연거푸 두 차례나 발생했다. 나중에 추정된 발화원인은 가로등이 녹아내리며 불똥이 튄 것. 이틀 간격으로 불이 나 방화가 아닌가 의심하며 상황실 CCTV까지 살피게 되었었다. 아무튼 산불감시 및 진화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생생하게 체험하였던 바, 산림청의 잘못된 산림정책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대선 결과가 확인된 3월 10일부터 4박5일 일정으로 서울에 다녀왔다. 정기적인 처방을 받았고, 아내가 참여한 서예전시회를 둘러보았다. 옛제자를 만나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얘기를 나누었다.

3월 21일 현장기도소 보고서로 이미 알렸듯이 재판을 받았다. 집행유예 정도를 예상하는 바 항소이유서를 준비해야겠다 생각하고 지난해 동영상 자료를 다시 뒤졌다. 

경찰들의 국가폭력이 주2회에서 3회로 늘어난 후 경찰들이 기도회 시작부터 도로를 봉쇄하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3월 29일부터는 미군들의 서머타임에 맞춰 작전 시작이 30분이 당겨졌다. 대선 전부터 미군들의 요구에 한 걸음 더 주민들을 압박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는데, 윤석열 당선 이후 그들이 말하는 '사드기지 정상화'에 시동을 건 모습이 역력하다. 이에 맞서 어떻게 싸워나가야 할지 숨이 막힌다. 화수목 주 3회 연속 새벽기도회로 시작하여 오후평화행동으로 마무리하는 일정을 진행하다 보니 힘겨워하는 모습들이 자주 보인다. 새벽기도회에 참여하는 인원도 2~30명 수준으로 줄었다. 
경찰들이 동원되는 날에는 늘 오후평화행동을 회관 앞에서 했었는데 한 번은 기지 정문 앞에까지 올라간 적이 있었다. 함께 올라간 누님들(할매들)이 투지가 발동하여 길 위에 앉아 돌아가는 기지공사 노동자들의 발을 몇 시간이라도 묶어보자고 그러시는데, 그렇게 하면 길게 오래 싸우지 못한다고, 이 싸움이 오늘내일만 하고 끝날 일이 아니지 않냐고, 그렇게 설득하여 밑에서 지켜보던 경찰이 정문 앞까지 올라오기 전에 차에 타시도록 하였었다. 그때 한 누님이 토로한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남아 있다. "얼마나 오래 싸우고자 하느냐? 빨리 쫓아낼 수 있도록 싸워야 하지 않느냐? 빨리 쫓아낼 방법을 찾아달라." 
또 다른 어느날 오후평화행동, 내려오는 노동자들이 주민들 애먹이려 띄엄띄엄 내려온다고 함께 모여 내려오라고 여러 차례 항의했는데 달라지는 게 없어서 누님들이 실력행사를 한 적이 있었다. 내려오는 차를 여러 대가 줄지어 기다리게 될 때까지 몸으로 막으려 했는데, 선두에 오던 승합차가 비켜가려 하다가 봉정할매를 치일 뻔하였다. 부녀회장을 비롯하여 교무님들이 크게 걱정하며 봉정할매에게 주의를 주었는데, 그러다가 돌아가시면 어떡하라고 그러시느냐는 얘기에 봉정할매의 말씀이 또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어떡하긴 어떡해! 나 죽으면 그냥 둬. 시체 치우려 애쓰지들 말어. 사드 나갈 때까지 꼼작 않고 그대로 길 위에 누워 있을텡께." 몇 년 전 기름통을 들고 경찰들에게 달려들던 누님도 얼마 전 새벽기도회에서 경찰들이 위험하다며 보호해 드린답시고 들어내려 하자 "내버려 둬! 그냥 여기서 죽을텡께. 나 죽어도 내 시체 치울 생각 하덜말어!" 소리 지르셨다. 
소성리 할매들이야말로 한반도 평화를 위해 싸우는 국가대표라고 생각한다. 오늘 아침(4월 14일) 대전에서 오신 박희인 님 말씀처럼 국가대표들은 국민들의 응원을 항상 받고 있다며 많은 분들이 지켜보고 있고 그리고 언제든 함께 연대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문정현 신부님과 함께 봄바람순례단이 3월 24일 다녀갔다.))

매월 마지막 주일은 대구마가교회가 소성리현장예배를 드리는 날. 27일 주일을 앞두고 24일 목요일 설교를 부탁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사실 하고 싶은 얘기들이 쌓여 있었다. 그러나 22일 화요일 오후평화행동에서 코로나 격리에서 해제된 정목사가 와서 마이크를 함께 사용했는데, 아무래도 그때 나도 감염되었었나 보다. 24일 목요일 새벽기도회, 여리고 기도(기지통문15-1능선길), 오후평화행동으로 피로가 겹겹이 쌓인 뒤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목욕을 하고도 풀리지가 않았다. 금요일 설교를 거절하고 겨우 24일 주일 현장예배에서 지킴이 현장발언만 하고 말았다. 예배를 마치자마자 기침과 가래 미열 등의 증상이 나타나서 자가검사키트로 검사해 봤다.
결과는 양성반응. 떠난지 1시간도 안된 마가교회 교우들에게 알리고, 아침 기도회와 평화행동을 함께한 동지들과 금요일, 토요일 함께했던 동지들, 누님들에게 연락했다. 보건소에 전화하여 후속조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화장실도 샤워실도 수도시설도 없는 컨테이너 숙소에서 자가격리를 하는 게 어려운데 군청에서 운영하는 격리수용시설이 없단다. 오히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스스로 찾아보라는데, 누구에게 기대야 하나?
보건소에선 아직 확진으로 분류할 수 없는 단계이고, 무엇보다도 급한 것은 일단 확진자로 간주하고 치료가 가장 급한 것이니, 치료기관으로 지정된 병원에 찾아가 신속항원검사와 약처방을 받으라고 하였다. 일요일이라 그것도 다음날이나 가능하다며 다음날 일찍 다녀오란다.
28일 월요일 아침 9시도 되기 전에 무강병원에 도착하여 진료를 받았다. 약을 처방받고 돌아오니 보건소에서 연락이 왔다. 다시 한번 자가격리 시설에 대해서 상의하였으나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을 폐가의 화장실을 이용하되 주민들의 발길이 끊어지는 야간이 아니면 차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세면이나 샤워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고, 설거지 정도만 마을회관 건물 밖 수도를 이용하되 주민들의 왕래가 없을 때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자가격리 장소를 현장기도소 컨테이너로 신고하였다.
소희쌤의 도움으로 자가격리를 위한 초단기 임대 원룸 빌라를 중개하는 앱을 설치하고 여기저기 알아보았는데, 임대료가 일주일에 20만 원 이상 드는 데다가 격리기간 동안 먹을 음식, 갈아입을 옷가지, 컴퓨터 등등,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이사를 각오해야 했다. 결국 포기하고 컨테이너에서 격리 생활을 견뎌내기로 했다.
27일 주일 저녁에 마가교회 배장로님이 당장 필요한 거 없냐며 초전농협에서 사다 주겠다고 연락해 왔다. 시리얼과 우유를 부탁했더니 꿀에 잰 무우와 치즈까지 들고 오셨다. 슈퍼 형님은 잘 먹어야 면역력이 높아진다며 냉동식품들 중에 몇 가지를 가져다주셨고, 격리된 기간 여러분이 과일과 간식, 반찬거리들을 가져다주셨다.
29일 화요일은 새벽기도회가 30분 앞당겨진 첫날이었는데, 참여할 수도 없으면서 일찍 깨었다. 새벽 3시쯤 화장실을 다녀왔고,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경찰버스 들어오는 소리에 더 이상 잘 수가 없었다. 기도회가 시작되었는데 참여는 못하더라도 컨테이너에서 사진이라도 찍어두고 싶었다. 도로까지 나가 잠깐 사진을 찍었는데, 컨테이너 지붕 위에 올라가 촬영하는 건 멀찌감치 떨어진 곳이니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참 동영상을 찍고 있는데 강교무가 와서 빨리 내려가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가라고 성화였다. 이 정도도 문제가 되나 싶었지만 결국 내려와 컨테이너에 틀어박혔다. 처방받은 약에 항히스타민제가 들어 있어 약을 먹으면 30분 후엔 정신을 집중할 수 없었다. 1~2시간 자고 일어나 1~2시간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식사하고 다시 약 먹고... 
30일 수요일은 아침에 아예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버스 들어오는 소리로부터 밖에서 기도회 진행하는 소리까지, 게다가 새벽이면 심해지는 변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일어나자마자 차로 폐가 화장실로 향했다. 볼일을 보고 컨테이너로 돌아가자니 밖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나도 신경이 쓰이고, 기도회 중에 차로 왔다갔다 하는 나에게 동지들의 신경이 모아지는 것도 미안하여 기도회가 끝날 때까지 차라리 차 안에 들어앉아 있기로 했다. 동네에서 빠져나와 밖으로 나가 부상-입석-활깃재-소성리로 크게 한 바퀴 돌아오려고 했는데, 월명리쯤에서 페북 라이브로 보니 벌써 경찰은 주민들을 들어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럼 멀리 돌 것 없이 동영으로 해서 평화계곡-진밭교로 내려가면 될 것 같아 짧은 코스를 택했다. 진밭교를 지나 내려오는데 주민들은 경찰의 강제해산에 맞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서행으로 내려오는 중에 할매들과 경찰들이 내 차를 보고 놀라고 있었다. 컨테이너 앞에 주차하는데 경찰들이 달려들었다. 주차할 때 남겨놓는 연락처를 들고 전화로 얘기하라고 소리쳤지만 닫힌 창문 때문에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 확진자이니 떨어져라, 할 얘기 있으면 전화로 말하라고 소리친 후, 다시 문을 닫고 연락처를 들어 흔들어 보였다. 경찰은 연락처를 확인만 하고 전화를 걸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오는데 채증 카메라를 들이댔다. 확진자이니 가까이 오지 마라고 하면서 왜 채증을 하느냐고 항의하였다. 경찰이 차로 어딜 다녀오느냐고 물었다. 화장실 다녀왔다고 대답해주고 돌아섰다. 멀찌감치 있던 정보과 형사가 무전으로 손짓으로 다가왔던 경찰들을 제지하였고 난 다시 한번 할 말 있으면 전화로 얘기하라고 소리치고 컨테이너 안으로 돌아왔다.
31일 목요일 아침도 새벽 화장실이 문제였다. 기도회가 진행중인데 또 차로 이동하면 동지들이나 경찰들이나 신경을 쓸 것 같아서 컨테이너 뒤로 돌아 걸어서 다녀오기로 했다. 다녀오는 동안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는데, 천주교 컨테이너 앞 길 위에 도착하니 부녀회장님이 와서 걱정을 해주셨다. 경찰이 격리 위반 고발 조치한다고 벼른다며 화장실은 차를 타고 이동하라고 하셨다.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 답답했다. 사실 격리기간이 끝나도 내가 감염된 경로를 생각할 때 스스로 더 격리기간을 연장해야 할 텐데 어떻게 하는 게 최선일까 고민되었다. 일단 당국이 정해준 격리기간이 끝나면 차라리 서울집에서 쉬는 게 좋겠단 생각을 했다. 격리기간 끝나면 다시 자가검사키트로 확인한 후 양성이면 초단기 임대로 가고 음성이면 서울집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4월 1일 금요일 처방받은 약들을 다 먹었다. 경찰들이 동원되지 않는 날이라서 마음이 조금 편했다. 은학샘에게 자가검사키트를 사다 달라고 부탁했다. 보건소에서 연락이 왔다. 격리 위반으로 고발되어 현장조사를 하러 나온단다. 격리가 끝난 뒤 4월 5일 화요일쯤 조사하러 가려고 하는데 시간이 괜찮겠냐고 한다. 누가 고발한 거냐고 물어보니 경찰서에서 증거사진을 보내왔단다. 어떤 사진들이냐고 확인하니 컨테이너 지붕 위에 있던 모습과 차를 타고 다닌 모습 등이 찍혀 있단다. 격리 기간 해제되면 서울에 다녀올 생각이었다고 하니 그럼 그다음 주로 미루자고 하였다.  
4월 2일 토요일 처방받은 약들이 떨어지고 나니 다시 재채기와 가래, 미열이 도지는 것같았다.
4월 3일 일요일 약간 호전된 것같았다.
4월 4일 월요일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자가검사키트로 확인했다. 음성. 한 시름 놓으면서 서울로 올라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컨테이너를 어떻게 소독하나... 침구류는 햇빛에 말리고, 구석구석 대청소를 하고 손소독제로 닦고 서울로 가서 사용할 것들을 챙기느라 힘이 들었다. 하루를 더 쉬고 올라가기로 했다. 
4월 5일 화요일 책방 컨테이너 지붕위 멀찌감치서 페북라이브로 중계하면서 새벽기도회를 지켜보았다. 격리가 공식적으로 해제되었고 자가검사로 음성도 확인했는데... 접촉은 삼가면서 내려와 몇 장면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집회가 끝나고 주민과 연대자들이 모두 돌아간 뒤 마을회관 샤워장에서 샤워와 면도를 하고 출발 준비를 끝내고 나니 12시. 식사와 설거지를 마치고 1시. 서울로 출발했다.
4월 5일부터 13일까지 8박9일을 서울집에서 쉬었다.
처음 3일은 격리되었을 때보다 훨씬 아팠다. 호흡이 가쁘고 입안이 마르고 미열이 오르는 것같았다. 너무 숨이 가빠 산소캔을 찾았다. 죽을 것처럼 괴로운 밤을 보내고 당일배송으로 받은 산소캔을 들이마셨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병원으로 달려가야 하나?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처방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무언가 다른 일에 집중해보려 애썼다. 두뇌회전도 멈췄는지 방금전에 나눈 대화에서 무슨 약속을 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케이블 방송으로 당구, 바둑, 여행 프로그램 등을 보면서 자다깨다를 반복했다. 코로 식염수를 들이마셨다가 헹궈내면서 증세가 호전되기 시작했다. 밤만 되면 공황증세처럼 불안해져서 막걸리를 마시고 잠을 청했다. 3일째 그러니까 금요일 오후부터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운동량이 부족한 것이 걱정되어 9일 토요일에는 세월호 집회와 행진에 참여하기로 했다. 범국민대회보다 더 많은 사람과 고성능 앰프를 동원한 수구보수 기독교 세력의 집회들을 보면서 착잡했다. 모처럼 만난 예수살기 동지들과 제자와 늦은 시간까지 함께했다.
토요일에 모처럼 땀흘린 것이 문제였는지 10일 일요일 모교회인 평화를만드는교회에 갔다가 예배가 시작되자마자 재채기와 콧물 미열이 발생하여 급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오후에 푹 쉬고 나니 다시 호전되기 시작. 화요일에 보건소의 격리위반 조사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조금 더 뒤로 미루고 상태를 보아 소성리로 복귀하기로 하였다. 
소성리에선 아무 걱정하지 말고 푹 쉬고 완전히 회복한 뒤에 내려오라고들 하였지만 기도소 5주년을 맞아 예수살기 동지들의 현장방문 투쟁이 예정되어 있고, 곧이어 1심재판 선고도 기다리고 있는 형편에, 격리위반 조사도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 마냥 쉬고 있을 수도 없었다.
소성리에 복귀하기 전에 늘 나의 건강에 관심을 갖고 최선의 방침을 조언해주는 의사 친구에게 찾아가 상담을 하기로 하였다. 마침 꼭 필요한 순간에 전화를 해 준 친구가 고마웠다. 수요일이 비번인 친구에게 들러 소성리로 복귀하기로 하고 수요일 저녁 대구로 향했다.
친구는 의사들이 코로나 치료제로 알려진 팍스로비드 처방을 기피하는 문제를 지적했다. 중증으로 악화되는 걸 막기 위해 팍스로비드 처방을 하는 것인데, 겨우 30만명 분을 수입하여 그 많은 확진자 발생에도 불구하고 15만명 분만 소비되었다고 했다. 어쨌든 나의 경우 더 이상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을 상황이니 영양보충 잘 하고 열심히 걷고 관리나 잘하면 되겠다면서 막걸리를 권했다.
수요일 밤늦게 소성리로 돌아왔다. 14일 오늘 새벽기도회에 예전처럼 참여했고, 오후평화행동에선 마이크를 잡았다. 영재팀장이 과부하가 걸렸었는지 허리가 다시 아프다고 했다. 오랜 시간 자리를 비운 내 탓인 것같아 미안했다. 오후 3시쯤 군청보건소에서 세 명이나 와서 경찰이 증거로 제시한 사진들에 대해 나는 어떤 입장이었는지 설명을 들었다. 화장실을 이용했던 폐가의 위치도 사진을 찍고, 현장상황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보건소 입장에선 미리 격리시설에 관해 도움을 요청했던 사실도 알고 있었기에 나의 입장을 충분히 수긍하고 있었다. 보건소에선 고발할 의지가 없다고 경찰에 통보할 것이나 경찰이 수긍하지 않고 또 다른 주장을 하면 다시 또 보충조사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작년에는 내성발톱 수술, 무릎관절 통증 등으로 거리가 먼 화장실, 수도시설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겠다 생각했는데,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더욱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문제인데 마을안에 구입한 집이 당장 입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리모델링 일정이 한없이 늦어지고 있다. 군에서 추진하고 있는 해뜰말사업의 혜택을 포기하고라도 당장 집수리를 추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