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에서/어떤 분의 깨달음을 고마워하며

[스크랩] 물음표를 부활시켜야 한다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강남순 교수의 페북에서 전재)

도덕쌤 2018. 2. 10. 17:43


물음표를 부활시켜야 한다

2014년 5월 11일 오후 11:39

한국, 영국, 그리고 미국의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오면서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점 중의 하나는, 물음표에 관한 것이다. 한국의 공교육은 학생들에게 물음표를 제거시키는 교육을 시킨다. 그러다 보니 교회도 물음표를 제거한 신앙을 가르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래서 무수한 물음표들과의 치열한 씨름과 성찰의 현장인 대학도 이러한 물음표가 부재한 공간이 되어 버리고, 기업화되어 그 속에서 학생들은 대학을 "취업준비"하는 공간으로 밖에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치열한 씨름과 비판적 성찰에서 요청되는 "왜"라는 물음표들은  인류의 문명을 일구어 온 가장 중요한 초석이다. 진정한 배움이란 사실상 이러한 "왜"라는 물음표를 가지게 됨으로서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물음은 해답보다 훨씬 심오하다 (Questions are more profound than answers)" 라고 하면서 물음표를 지니지 않는 사람은 해답도 가질 수 없다고 강조한다. 미국에서는  "예수는 해답이다 ( Jesus is the answer)"라는 스티커를 단 차들을 아직도 간혹 볼 때가  있다. 어느 날 나는 학생들과 이 스티커에 대하여 토론을 한 적이 있다. 물음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사례를 끌어 왔는데, 학생들과 토론을 하면서 "해답"이란 "물음"을 전제해야 하니 우선적으로 물어야 할 것은 "당신의 물음이 무엇인가? (What is then your question?)"이라는 것이라는 결론에 함께 이르를 수 있었다. 이것은 사소한 예 같지만, 물음표가 없이 해답만을 주려는 사회들은 언제나 정치적 지배자의 독재, 지도자의 권력남용, 종교지도자들의 "진리왜곡"을 당연하고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물음표의 부활"은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나는 본다.  그래서 나는 "해답을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물음 묻기"를 가르치는 사람이 좋은 선생이라고 생각하고 이 물음묻기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것을 중요한 나의 교수철학으로 삼고 있다.


독일에서 유치원을 다니고 미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나의 두 아이들이 학교생활에서 가장 적응하기 힘들었던 곳은 언어/문화가 낮설었던 독일이나 미국에서가 아니라, 유학이 끝난 후 돌아 간 "고국"인 한국 학교에서였다.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지만, 그 아이들에게 가장 힘들었던 것중의 하나는  "왜"라는  물음표가 박탈당한 학교생활을 해야 했다는 점이었다. 작은 아이가 선생님께 "왜 일기장을 선생님께 제출해야 하나요?"라고 물었다가 문제아 취급을 받은 적도 있다. 그 아이에게 일기장이란 자기가 혼자서만 보는 것인데, 선생님께 그 일기장을 제출하여 도장을 매일 받아야 하는 숙제가 이해가 안되었던 것이다. 증학교1학년에 들어간 큰 아이는 교문앞에서 머리가 좀 길다고 가위로 앞머리를 잘라 아이 손에 놓은 선생님께 "왜"라고 했다가 굉장한 언어폭력을 경험하기도 하면서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하는 날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의 얼굴에서 점점 웃음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면서, 과연 저 아이들에게 그 해맑고 명랑하던 웃음을 되찾아 줄 수가 있을 것인가 하는 암담함에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던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아이들을 한국학교에 보내면서, 나는 한국의 교육구조 또는 한국문화의 뿌리깊은 위계구조의 문제점의 심각성이 어떻게 공교육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무한한 창의적 잠재성을 억누르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이론과 현장의 교차점"의 중요성을, 그리고 사회변혁의 장인 "현장"에서 "왜"에 대한 치열한 작업인 "이론"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하여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경험들이없다. 


어릴 때부터 암기하는 것을 교육의 중요한 틀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왜"를 묻는 아이들은  어른들 말을 존중하지 않는 "버릇없는 아이"가 되어 버리고, 교회에서"왜"를 묻는 사람들은 "기도가 부족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예" 와 "아멘"이 학교에서나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윗 사람"이 이야기 하면 무조건 "예"라고 해야 하니 "어른"이 "기다리라"고 하면 어떠한 긴급상황에서도 기다리기만 해야 하고, 담임목회자가 어떠한 비리를 행하거나 비상식적인 일을 해도 무조건 "아멘"하는 기독교인들이 되어 버린다. 물음표가 부재한 사회, 물음표를 부정적인 것으로 가르치는 학교, 물음표를 신앙없음의 표지로 간주해버리는 교회에서 비판적 사유를 하는 민주시민이 양산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도로테 죌레라는 독일 신학자는  청소년의 종교교육을 위하여 쓴 책의 제목을 "예와 아멘만이 아닌 (Nicht nur Ja und Amen [Not just Yes and Amen])" 이라고 명명하면서, "불의에 저항하는 것"--이것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임을 강조한다. 불의에의 저항은 "왜"라는 물음표가 부재한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지 않은가.


한 사람이 지닌 창의적 사고력, 그리고 비판적 사유능력은 끊임없이 "왜"를 묻는 물음표로부터 시작한다. 진정한 배움이란 "정보"를 암기하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정보를 자신의 삶의 정황과 연계시키는 치열한 씨름을 통하여 비로소 "지식"으로 전환되는 지점에서 가능하게 된다. "정보"가 "지식"으로 전환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자명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자신의 인식세계를 개방화시키고 자신의 삶과 연결시키는 치열한 과정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물음표를 박탈한 교육, 물음표를 제거한 독서, 물음표를 갖지 못하게 하는 성서읽기--이 모든 것들은 단지 "정보"만을 줄 뿐 한 사람의 사유세계를 형성하는 영양분으로서의 진정한 "지식"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암송대회에 익숙한 사람들이 정작 예수의 메시지를 자신의 삶에서, 이 세계에서 어떻게 실현해 나갈 것인가 라는 물음표를 박탈당한 신앙생활의 문제를 보지 못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거대한 체제를 당장에 바꿀 수는 없지만, 한 개인들이 몸담고 있는 다양한 자리에서--그것이 가정이든, 교회이든, 직장이든, 또는 개별적 관계이든--물음표를 존중하고 물음묻기를 장려하는 문화를 귀퉁이에서라도 연습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작은 변화들이 커다란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다양한 사회변혁운동사를 통해서 드러난 것이다. 그렇기에 다양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사라져 버린 물음표를 부활시키는 것--한국사회, 학교, 교회의 긴급한 과제라는 사실을 다시 생각해 본다.  




출처 : 물음표(?)에서 느낌표(!)까지
글쓴이 : DoDuck 원글보기
메모 : 강남순교수의 페북을 찾으니 연결할 수 없어서 옮겨두었던 글을 다시 찾아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