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에서/어떤 분의 깨달음을 고마워하며

[스크랩] 연중 제1주간 수요일

도덕쌤 2019. 1. 16. 01:03

<연중 제1주간 수요일>(2019. 1. 16. 수)(마르 1,29-39)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병고’는 인간을 괴롭히는 고통들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고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활동을 보면,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온갖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그렇지만 ‘병의 치유’는 예수님의 활동 목적이 아니고,

‘복음 선포’의 한 방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만 복음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치유의 은총’을 통해서도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병자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몸의 병’을 고치는 것은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신앙생활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갔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마르 1,29-31).”

 

여기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라는 말의 표현만 보면,

사람들이 상황을 설명했을 뿐이고,

고쳐 달라고 간청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고 있었고,

그래서 치유의 은총을 청할 생각은 못하고 있었다고 짐작합니다.

<그러나 루카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치유를 간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루카 4,38).”>

예수님께서는 어떤 치료 과정 없이

부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는 것만으로 병을 고쳐 주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은 ‘병’을 지배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루카복음 4장 39절에는

예수님께서 열을 꾸짖어서 내보내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1,32-34).”

 

예수님께서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신 일이 금방 소문이 되어 퍼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마귀를 쫓아내신 일도(마르 1,23-26)

이미 널리 소문이 퍼져 있었습니다(마르 1,28).

그런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사람들에게 ‘진정한 믿음’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은 아직은 예수님을 “마귀를 잘 쫓아내고, 병을 잘 고치는 분”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몸의 치유’였을 뿐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으라는 요구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자비’는 아무 조건 없이 그냥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 1,35-39).”

 

여기서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이곳에서 한 것처럼’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은, ‘이곳에서’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은,

사실은 복음 선포였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궁극적인 구원’에 관한 ‘기쁜 소식’입니다.

신앙인은 ‘몸의 치유’로만 만족하고 거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이 이야기에서 예수님을 찾아다닌 사람들은

구원을 주시는 구세주가 아니라, ‘병을 잘 고치는 의사’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신 일은,

‘이곳 사람들’을 버리신 일은 아닙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라는 말씀은, “함께 가자.”,

즉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입니다.

‘몸의 병’을 고치기를 원해서 예수님을 찾아왔고,

그래서 ‘치유의 은총’을 얻었다면, 그 다음에는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몸의 치유’는 신앙 여정의 출발점일 뿐입니다.

우리는 ‘영혼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지금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경우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은 지상에서 잠깐 동안만 거주하는 임시 천막집일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이 천막집에서 우리는 탄식하며,

우리의 하늘 거처를 옷처럼 덧입기를 갈망합니다(2코린 5,1-2).”

(우리가 부활해서 새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되면, 새로운 몸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의 이 몸과는 완전히 다른, 새롭고 영원한 몸.)

“우리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몸을 떠나 주님 곁에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몸으로 한 일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2코린 5,6-10).”

(‘영혼 구원’을 강조한다고 해서 ‘몸’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몸’도 ‘영혼’처럼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몸’으로 죄를 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선행과 사랑을 실천합니다.

신앙인은 ‘몸’에 대한 헛된 집착을 버리고, ‘몸’을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구원을 받기 위한 도구로 잘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 Rev.S.Moyses
글쓴이 : Rev.S.Moyses 원글보기
메모 : 상식의 선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말씀들을 만날 때 신학적인 질문이 싹 트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질문에 가장 요령껏 설명해 주는 사제로 송영진모세 신부님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