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에서/어떤 분의 깨달음을 고마워하며

신성의 빛을 본 사람(양재성목사님 설교 2018.11.11)

도덕쌤 2018. 11. 11. 17:03

신성의 빛을 본 사람

마가복음 12장 38~44. 히브리서 9장 24~28절


▪ 예수, 믿음과 신비한 빛

  종교는 가장 높은 가르침, 그 이상의 가르침이 없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이 가장 큰 가르침, 으뜸이 되는 가르침임을 믿는 종교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이 최고의 가르침이며, 예수의 삶이 가장 정의로운 삶이며, 예수가 걸어간 길이 가장 신비한 길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에게서 참 사람의 길을 찾은 것입니다. 

  예수는 투박하고 보잘 것 없는 어부 베드로의 내면에서 흔들림 없이 당신의 교회를 세우는 반석을 발견하셨고 초대교회의 큰 기둥이 되도록 이끄셨습니다. 예수는 탕녀 막달라 마리아 속에서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사랑을 보시고 처음 교회의 위대한 여성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비단 장수 아들 프란체스코 속에서 영혼의 빛을 보고 그 빛으로 어두운 중세를 밝히십니다. 예수는 최악의 굶주림 속에서도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한 여인의 영혼의 샘물을 보시고 전 인류의 영혼을 구하는 사랑의 성인으로 이끄는 분이십니다. 아니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들도 예수를 만나면 놀라운 삶의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는 위대한 변혁의 종교입니다. 그 변혁의 역사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내 삶을 통해서도 여러분 삶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이어질 것입니다.  

  믿음이란 그 사람 속에 감춰져있는 신비한 빛을 발견하고 그 빛을 드러내게 하는 힘입니다. 이미 예수 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신비한 빛이 당시 보잘 것 없는 민중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 기독교의 출발입니다. 정말 보잘 것 없었던 사람들, 역사의 중심에 단 한 번도 서보지 못하고 중심에서 밀려나 주변부에서 무지렁이처럼 살아가던 사람들. 고아와 과부들,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역사의 중심에 서게 하신 분이 예수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매력이며 핵심입니다. 기독교가 이것을 상실했다면 그건 기독교의 전부를 잃은 것입니다. 

  예수는 그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신 분만이 아닙니다. 그는 지극한 사랑으로 우리의 존재 안에서 신성한 빛을 발견하도록 이끄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다가 죽음에 삼켜져 속절없이 이 땅을 떠나가야 하는 허무한 인생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 보내졌고 그 거룩한 사명을 이뤄야할 책임을 갖고 왔음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는 당신의 목숨을 걸고 우리를 역사의 중심에 서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당신의 전부를 걸고 목숨을 바쳐 주변부 인생을 중심에 서게 하신 분입니다. 가난하고 연약한 존재들을 존귀한 존재로 대해주셨고 존귀한 존재로 살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내 인생과 여러분 인생에 최고의 기적이며 행복이며 감사입니다.  


▪ 예수의 당부

  오늘 복음서의 성서일과는 마가 공동체가 전하는 복음서 12장의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타이름입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을 조심하라고 당부합니다. 예수는 당시 율법학자들과 자주 대립하셨고 각을 세웠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었지만 실상은 율법을 가장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율법의 정신을 망각하고 율법의 형식만 주장한 자들입니다. 율법이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설립 정신도 까먹고 오히려 그 율법으로 약자들을 정죄하고 죄인으로 규정하는 일에 사용합니다. 당시 율법을 폭력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든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노여워한 이유입니다. 예수는 그 사람 속에 감추어진 신성한 빛을 드러내는데 방해가 되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았고 그것이 율법이라면 율법을 파괴하셨습니다. 그 일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행위라고 간주하였습니다. 

  국정농단과 사법농단에 이어 종교농단으로 예배가 왜곡되거나 종교가 타락하면 그 악취는 더 지독합니다. 박근혜 국정농단에 이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양승태의 사법농단입니다. 양승태 사법농단 세력은 상고법원을 얻기 위해 사법부의 정의를 악의 수렁에 쳐 넣은 자들입니다. 일제의 의한 강제징용 재판을 막고 지연시키고 심지어는 보상을 못 받도록 하기 위한 법적 조치까지 했다니 놀랍습니다. 이는 일본 재판부보다도 더 일본다운 판결이라 일본은 고무적이고 우리는 경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증스러운 제사는 받지 않겠다고 거부하십니다. 너희들이 바치는 제물의 고기 냄새도 맡기 싫다며 책망하십니다. 예수도 가증스러운 예배를 거부하시고 회초리를 들어 양을 쫓아내고 돈 궤짝을 둘러엎으십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그런 상황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 위선과 가증함

  예수는 진실 덩어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진심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기에 그 속에서 나오는 빛은 강렬했습니다. 예수는 위선과 가증함을 가장 싫어하셨습니다. 당시 가증스럽고 위선적인 사람이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예수가 율법학자들을 싫어하신 이유입니다. 그들은 예복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했고 회당과 잔치자리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했으며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남에게 잘 보이려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는 이런 사람들은 율법학자라도 더 엄한 심판을 받는다고 경고하십니다. 이는 율법학자들과의 전면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과 가치를 훼손하고 호도한 자들입니다. 지금도 이런 사람들은 참 많습니다. 성경을 호도하고 그 진의를 훼손시킨 사람들은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기독교를 병들게 하고 망하게 하는 것은 외부의 힘이 아닙니다. 내부를 썩게 만드는 것은 거짓과 가증함으로 옷 입은 종교 농단세력들입니다. 


▪ 태극기 부대와 보수 기독교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병폐 중 하나가 태극기 극우세력입니다. 그 배후에 근본주의적 기독교가 있습니다. J 목사는 문재인 대통령을 종북주의자로 탄핵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을 석방하자고 나섰습니다. 이 사람은 대신측 총회장을 지낸 사람입니다. 정말 심각한 종교농단 세력입니다.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가 누구신지도 모르는 무식하고 무모한 자들입니다. 예수는 이런 가증한 것들이 하나님의 성전에 선 것을 보면 말세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지금은 영적으로 말세입니다. 이는 모든 교단이 대동소이합니다. 금권선거는 물론 부패한 마음, 사악한 술수, 성적 문란, 비윤리적인 행동 등 이미 상식이하로 추락하였습니다. 그 추태가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 과부의 두 렙돈

  예수는 성전 문 앞에 앉아서 헌금함에 돈 넣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많은 부자들이 거드름을 피우며 헌금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가난한 과부가 부끄러움과 미안함으로 두 랩돈의 헌금을 넣은 것을 보았습니다. 과부에겐 두 렙돈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여기에서 가난한 과부가 가장 많은 헌금을 드렸다며 칭찬하셨습니다. 렙돈은 당시 화폐 단위 중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 지금은 얼마쯤 될까요? 천원일까요? 아마 그 정도일겁니다. 천원이 그 여인의 전부였다면 그녀는 누군가에게 강도질 당한 것이 분명합니다. 율법학자들은 과부를 보호하고 돌봐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율법학자들이 과부의 가산을 삼키곤 하였습니다.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긴 격이 되었습니다.  


주변부를 대표하는 가난한 과부는 중심부를 대표하는 율법학자와는 상대 개념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역사는 종교 기득권자들인 율법학자들을 통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는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과부를 통해 역사적 변혁이 일어난다고 주장합니다. 교회 개혁도 성직자 그룹을 통해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평신도들을 통해 일어납니다. 사회변혁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배계급을 통해 혁명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 자각된 민중들로 인하여 개혁과 혁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잠시 잊고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이 다시 일깨워주었습니다.   


▪ 함석헌과 씨ᄋᆞᆯ

  함석헌은 안으로부터 오는 음성을 맘을 다 모아 듣고, 받은 말씀을 몸을 드려서 이루어 가신분입니다. 그는 주장할 것도 거부할 것도 타협할 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에겐 삶이 그저 듣고 그저 받고, 들은 대로 받은 대로 살 뿐이었습니다. 자신을 통째로 버렸기에 가능한 삶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존재하는 것은 존재해야할 이유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동물도 식물도 사람과 같이 거기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소위 ‘뜻’입니다. 함석헌은 자신이 이 땅에 온 것은 뜻을 전하러, 뜻을 이루러 왔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자신의 일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니고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증언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증언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일을 하러 온 것이 아니고 우리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온 것입니다.    함석헌은 역사의 주체인 너, 하나님의 아들인 너를 ‘씨ᄋᆞᆯ’이라고 말했습니다. 함석헌은 민의 역사의 시작은 동학혁명에서 3.1혁명에서 찾았습니다. 민이 스스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저항하는 데서 민주주의 역사가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함석헌은 민중을 대접하지 않는 자는 민중의 적이요, 민중을 적으로 삼는 자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사고 망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말 없다고 민중을 업신여기지 말고 민을 주로 모시고 절하고 호소하라며 하나님은 그 민중에게 명을 내리신 것이요, 하늘 말씀을 받기 때문에 민중은 말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삶은 철저하게 바닥살이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닥살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십니다. 


▪ 진보와 보수

  평신도 성경학교란 이름으로 진행되는 서대문지방 사경회는 5일간 500여명이 모여 다양한 주제로 성경과 기도, 교리와 영성을 공부하였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과목은 산상수훈입니다. 산상수훈은 복음서 중의 복음서요. 예수의 어록을 집대성한 예수의 생방송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산상수훈엔 마태교회의 의도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습니다. 마태공동체는 예수의 다양한 말씀을 자신들의 상황이 맞게 재해석하고 편집하였습니다. 가장 위대한 지도자 모세보다도 더 위대한 인물로 예수를 제시합니다. 율법의 권위보다 예수의 가르침을 더 큰 권위로 세웁니다. 결국 마태 공동체는 율법의 완성자로 예수를 소개하였으며 예수의 가르침이 율법의 한계를 넘어선 하나님의 새로운 복음임을 제시하였습니다.  

  대부분 70대 노인 성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지하게 경청해 주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교회에 대하여 많은 실망과 체념을 하면서도 교회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아직 교회 개혁에 대한 희망이 남아 있는 이유입니다. 첫 강의를 마치자마자 목사님은 진보적이죠? 라는 질문이 나왔습니다. 그 질문은 불편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진보적이 목사입니다. 사회가 교회가 이렇게 잘 못되었는데 그냥 두자고 할 수 있습니까? 기존 질서를 바꾸자는 것이 진보요, 그 바꿈의 주체가 지식인이나 권력집단이 아니라 민중들이라는 점에서 전 진보주의가가 맞습니다. 예수가 그런 분이셨습니다. 기존 질서인 유대교 전통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복음을 제시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예수의 길에서 하나님의 빛을 보고 예수의 가르침과 삶에서 구원의 길을 보고 예수살기를 실행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보수 중에 보수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더니 모두들 아멘이라고 박수가 나왔습니다. 우리 교우들한테는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박수와 우렁찬 아멘을 받아보았습니다. 기분이 좋았습니다. 역시 나도 사람입니다.   


▪ 예수의 관점과 셈법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관심이 어디로 흐르고 있는 지 감지해야합니다. 예수의 관심은 늘 하나님의 뜻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아파하고 소외된 약자들이 하나님의 관심사입니다. 예수의 셈법은 독특합니다. 예수는 많고 적음이 아니고 그의 부분이냐 전부냐를 보십니다. 아무리 많이 바쳤어도 그것이 그의 일부라면, 아무리 작은 것을 드렸어도 전부를 드린 사람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는 물질에 대해서는 철저하십니다. 하나님과 재물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부자 청년에게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와서 당신을 따르라고 말함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에선 나누어지지 않는 부를 거부하십니다.  


가난한 과부에겐 하나님 신앙이 전부였습니다. 하루를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불안정한 사회에서 내일을 보장 받을 수 없는 민중들에겐 하나님 신앙 없이는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신앙은 여가 선용이나 친목 다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신의 전 생을 걸고 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그 점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봅시다. 여러분은 시간 중에 얼마를 하나님과 이웃과 사회를 위해 사용하십니까? 여러분에게 주어진 물질 중에 얼마를 하나님과 이웃과 사회정의를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시간과 물질이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 살펴보면 여러분의 관심과 삶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 예수의 길

  아직도 전 생을 걸고 자신의 길을 가는 자들이 있습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뜻에 전 생을 걸고 길을 갔습니다.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해 전 삶을 바쳤습니다. 인류를 구원하는 길을 열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가난하고 연약한 인생을 역사의 중심에 세우려고 십자가 처형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런 예수의 삶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눈감으실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의 삶을 가장 위대한 삶으로 그의 사랑으로 인류 구원의 길을 여셨던 것입니다. 

  그 일은 오늘날 교회를 통해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이어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를 통해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뜻은 오늘 우리의 삶을 통해 역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가 당신의 전부를 바쳐 하나님께 내 놓았듯이 우리의 손과 발을 하나님께 바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역사를 이어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길이며 기독교인의 길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신성한 빛을 발견하신 예수께서 우리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함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세워가자고 말입니다. 이 거룩한 초대에 기꺼이 길을 나섭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