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에서/어떤 분의 깨달음을 고마워하며

[스크랩]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도덕쌤 2018. 11. 27. 23:42

<연중 제34주간 수요일>(2018. 11. 28. 수)(루카 21,12-19)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심한 박해를 겪게 되면, 또는 박해가 아니더라도 인생살이의 여러 가지

고통을 겪게 되면, 이대로 종말이 오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무 괴로워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겠지만,

세상이 모두 망해 버리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그런 것이라면,

(단순히 죽어버리고 싶다는 심정으로 그런 것이라면,)

그것은 인내심과 믿음과 희망이 부족한 것이고,

신앙인으로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가 아닙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의 재림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야고 5,7-8).”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6-7).”

신앙인의 희망과 인내는 결코 헛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지상에서 겪는 고난은 잠깐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와 행복은 영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루카 21,12-15).”

 

여기서 ‘이 모든 일’이라는 말은 바로 앞의 8절-11절에 언급되어 있는,

가짜 재림 예수, 거짓 예언자,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심어 주는 어떤 천문학적 현상들을 가리킵니다.

“이 모든 일에 앞서” 라는 말씀은,

시간적으로 그런 일들보다 박해가 먼저 있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런 일들보다 박해가 더 종말을 의식하게 만들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박해가 가장 괴로운 시련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등은 모든 사람이 겪는 일이지만,

종교 박해는 신앙인들만 겪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는 신앙을 증명할 기회가 된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신앙을 증명하는 기회로 삼아라.”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박해가 없고 평화를 누릴 때에는 누구나 쉽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박해가 일어나면 제대로 잘하는 사람이 누구이고,

겉으로만 잘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드러나게 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바위에 떨어진 씨’가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다(루카 8,13).”

(이 말씀에서 ‘뿌리가 없는 믿음’은 ‘실천이 없는 믿음’으로 해석됩니다.)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인간적인 말재주로 변론하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말을 잘하는 것과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은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또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는 일은 말재주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는 ‘삶’ 자체가 신앙을 증명하게 됩니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라는 말씀은, 말재주와 지혜를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믿음에 믿음을, 확신에 확신을 더해 주시겠다는 뜻이고,

우리가 ‘삶’으로 신앙을 증명하려고 노력할 때 그것을 도와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에 바로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던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병이 나은 사람이 사도들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였다(사도 4,13-14).”

박해자들은 사도들의 ‘말’에 대해서 반박을 못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한 ‘일’에 대해서 반박을 못했습니다.

그것은 사도들의 ‘삶’에 대해서 반박을 못한 것과 같습니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6-19).”

 

박해 가운데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가족의 박해입니다.

가족이 박해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맞서 싸워야 하나? 집을 떠나야 하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2).”

“...... 여러분의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이

경건하고 순결하게 처신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리될 것입니다(1베드 3,1-2).”

예수님께서는 박해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5,44).

기도와 착한 행실과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는 것,

그것이 가족이 박해할 때 가족을 대하는 방법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도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 교회가 처음부터 미움만 받은 것은 아닙니다.

신자 공동체가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는 말도 있고(사도 2,47),

존경을 받았다는 말도 있습니다(사도 5,13).

사실 ‘모든 사람’이 신앙인을 미워하는 것은 아니고,

구원받기를 거부하면서 죄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신앙인을 미워합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런 사람들의 영혼을 가엾게 여겨야 하고,

그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라는 말씀은, 온갖 고난과 시련을 잘 참고 견디면서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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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Rev.S.Moy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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