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차마 말할 수 없는 이유

도덕쌤 2024. 11. 12. 02:01

그제는 어린 시절, 그러니까 반세기 전의 추억을 돌아보는 여행을 하고 어제 사진과 글을 남겼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들 가운데 가장 어린 날의 사건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가끔은 누군가와 상담하는 과정에서 고백한 이야기이고 형제들은 너무나 잘 아는 사건인데, 그 이야기를 [사진으로 엮는 자서전]이란 카테고리에 글로 남겨야 하겠지만, 차마 그 이야기는 글로 쓰지 못하여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

왜 나는 그 이야기를 글로 남기지 못하는가?

뼈를 묻겠다고 집까지 새로 지어가며 머물고자 했던 마을을 떠나면서, 그에 관한 일들이나 나의 입장을 명백하게 설명하고 싶었지만, 관련되어 떠오른 나의 감상이나 추상적인 화두들만 늘어놓고 있었던 것도 비슷한 경우이다.

왜 나는 글을 쓰지 못하는가?

 

두 번 다시 친구들과 싸우지 않겠다, 싸우게 되더라도 둘만의 싸움으로 마무리지을 뿐 주변의 싸움으로 확대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이후 스스로 바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어떤 모욕과 따돌림도 참고 견디어 왔다.

그리고 그 길이 바른 길이었음을 증명하는 경험도 했다. 이후 많은 경우에 나는 화해자 또는 중재자 아니면 위로자의 위치에 설 수 있었고, 내가 누군가와 싸우는 경우는 오로지 공의를 위한 것이었다.

전교조 투쟁이라든지, 전교조 이전의 학교내 민주화를 위한 싸움들... 세월호 사건 이후 거리로 나오면서 하게 된 갖가지 투쟁 현장들. 누군가와 의가 상할 정도로 다투었던 일들 조차도 나의 자존심이나 이해관계가 아닌 사회적 약자들을 수호하거나 그 누군가를 지옥에서 건져내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들이 매번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교사로서 실패했던 것처럼 위로자로서도 중재자로서도 실패했던 경험들이 너무 많고, 사회적 약자들을 더 구렁텅이로 몰아넣거나 누군가를 지옥에서 건져내기는 커녕 내가 지옥속으로 한 발 더 깊이 빠져든 일도 겪었다.

나는 선의가 항상 선한 결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과정까지도 모두가 선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치밀하게 성실하게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나의 고백이 가져올 결과를 예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군가에게 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특히 누군가의 잘못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그 잘못으로 인해 내가 너무 큰 고통을 느꼈던 일일수록 나의 고백이 그 누군가를 향한 정죄가 되고, 그 누군가의 인격 향상을 멈추게 하는 족쇄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불필요한 정보들을 모아서 누군가의 인격을 파괴하는 일에 사용하는 이들도 많은 세상이란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미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난 일임에도, 그것이 나의 인격 형성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임에도, 자서전이란 이름으로 고백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아직 진행중인 사건은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렇게 속병이 심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