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개똥철학/놀고 먹는 세상을 위하여

수고하지 않고 먹을 수는 없을까?

도덕쌤 2024. 11. 22. 01:29

신들도 먹고는 살았나보다. 
고대 중동의 창조 설화는 신들이 놀고 먹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신들이 당신들이 먹고 마실 것들을 손수 마련하지 않고 노예들을 부리고자 했는데, 그 노예로서 만들어진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신들이 기피하는 노동 - 벽돌을 찍어 집을 짓는 일, 성벽을 쌓는 일, 옷감을 짜는 일, ... 모든 힘든 일은 노예들을 부려먹고, 신들은 음주가무를 즐기며 놀았다는 얘기다. 
고대 중동의 지배계급은 자신들을 신으로, 신의 자녀로, 신의 가족으로 자처하며, 노예들을 부리고 있었다. 
신은 노예로서 인간을 창조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노예들인 히브리들은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를 다르게 설명했다.
"사람들은 어떤 존재인가, 신은 왜 인간을 창조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 히브리들은 "신이 창조한 세상을 관리하라고, 신을 닮은 신을 대리할 존재로, 사람이 창조되었다"고 대답했다.  신은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아름답게 여겼고, 사람들 역시 사랑스러운 존재였다, 당신의 자녀라고 말할 만큼. 비록 흙으로 빚어 만들었지만 그 코에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어 당신의 생명력을 물려받은 존재가 사람이었다.
히브리들의 창조설화에 따르면 처음 창조된 인간은 신이 창조한 세상을 관리하며 먹거리는 거저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저 나무에서 따는 정도의 노력만 하면 되었을 것이고, 신은 무얼 먹고 사는지 얘기도 없고 신의 먹거리를 위해 하는 일도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히브리 노예들이나 신을 자처하며 살았던 지배계급이나 먹거리를 얻기 위해서는 땀흘리는 수고를 해야한다고 믿은 것은 마찬가지였던 것같다. 히브리들의 창조설화에서도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 "죽는 날까지 수고를 하여야만, 땅에서 나는 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 
먹거리를 얻기 위해 하는 일들을 고역(苦役) -
몹시 힘들고 고되어 견디기 어려운 일로 여겼다는 것이다.

나는 과연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들을 고역으로 여기는 것이 인류사에 보편적인 현상이었는지 궁금하다. 
먹을 것을 찾기 힘들어 했을 것이라는 것은 짐작하지만, 먹을 것을 찾기 힘든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안정적으로 먹거리를 준비하는 일들이 과연 몹시 힘들고 고되어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을까, 오히려 기쁨으로 그 어려움을 이겨나가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은 언제나 힘이 들기 마련이다. 힘이 들어가는 것, 힘을 쓰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말이다.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이 중단된 상태가 죽음 아닌가? 싯달타 왕자는 인생이 고해라 하였으니 힘이 드는 모든 것을 고통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힘들다고 힘이 드는 모든 것을 견디기 어렵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여기까지 얘기하고보니 "수고하지 않고 먹을 수는 없을까?"라는 물음에 나는 "먹거리를 장만하기 위한 수고는 수고라고 여기지 말자"는 식의 답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하고 싶은 얘기의 핵심은 그게 아니었는데.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ㅡ 사람마다 힘들지만 그 힘이 드는 것을 즐겁게 여길 수 있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고, 어떤 일들을 그렇게 여기느냐는 저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먹거리를 장만하는 일을 고역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그 일을 놀이처럼 즐기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힘들지만 그 힘이 드는 것을 즐겁게 여길 수 있는 일들'이야말로 '하고 싶은 일'이고, '놀이'라고 할 수 있다면, 먹거리를 장만하는 일을 놀이로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모두가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먹거리를 장만하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또한 먹거리를 장만하는 일을 놀이로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모두가 먹고 살 수 있을 만큼의 먹거리를 장만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먹거리를 장만하는 일을 고역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돌아갈 먹거리는 어떤 핑계로 나누어 줄 수 있을까 생각해보는 중인 것이다.
아마 적절한 핑계를 만들지 못하고 그저 강도처럼 빼앗아 '나눔'을 '약탈'로 대치함으로써, '먹거리를 장만하는 일을 놀이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모욕하고, 그 모욕으로 인해 그 분들마저 더 이상 그 일을 놀이로 생각하지 못하게 된 것이 우리가 배워 온 역사가 아니었을까? N분의 1에 만족하지 못하고 '놀이처럼 먹거리를 장만하는 사람들'의 몫을 더 빼앗는 무리들 때문에 '모두를 먹여 살리는 이들 - 그 신과 같은 존재들'이 노예처럼 취급당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연영석의 「간절히」가 말하는 "내 마음 만큼 일하는 세상, 내 일한 만큼 갖는 세상, 내 마음 만큼 갖는 세상"은 문제가 많을 것같다. '내 마음 만큼 일하는 세상'은 좋다. 그런데 '내 일한 만큼 갖는 세상, 내 마음 만큼 갖는 세상'이라니! '내 일한 만큼'을 어떻게 잴 수 있으며, '내 마음'은 n분의 1에 만족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