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교실/사람의 등급

[스크랩] 사랑하는 단(亶)에게 (사람의 등급③)

도덕쌤 2017. 2. 7. 05:23

사랑하는 단(亶)에게

 

단(亶)아, 서울을 떠난 지 두 주째 되는 밤이다.

네가 얼마나 보고 싶은지. 고모가 카톡으로 “요구르트 한번 박력 터지게 먹는 강단아가”라며 짧은 동영상 보내준 것을 몇 번씩이나 돌려보며 그리움을 달랜다.

이곳 실상사의 주변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가족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폰카메라로 담아 카톡으로 보내주었는데, 한밤의 별과 달, 그 빛에 비친 모습은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안타깝구나. 달빛에 어른거리는 나무 그림자마저 아름다운 밤풍경인데 폰카메라로는 아무것도 담아낼 수가 없단다.


오늘은 이렇게 낮에 본 실상사의 풍경과 실상사에서 바라본 지리산능선이라도 보여주며 인격에 관한 세 번째 얘기를 시작할게.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다니?!!]에 이어 사람의 등급을 평가하는 일이 어떤 점에서 중요한지 얘기할 차례였다.

 

이 드넓은 우주 공간에 작은 점 하나에 불과한 인간이 서로 얼마나 훌륭한지 등급을 매겨본다는 것은 도토리 키재기 하는 것에 불과한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등급에 대해 네게 가르치려 애쓰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생이 무상함을 깨달은 석가모니도 중생을 제도할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아니? 불쌍한 중생들이 무의미한 집착에서 벗어나 진정한 깨달음을 얻어 해탈의 경지로 나아가기를 원했단다. 큰 깨달음을 얻고 보니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들이 불쌍해 보였던 거지. 할아버지는 바로 여기서 두 가지를 깨닫는단다. 하나는 “석가모니는 깨달음의 정도에 따라 사람들의 등급을 매기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생이 무상함을 깨달은 분도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불교에선 이를 ‘대자대비’ 줄여서 ‘자비’라고 하는데, 쉬운 말로 하면 ‘사랑’, 그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셨구나!”라는 깨달음.

사실 그 크기를 생각하면 무한한 우주에 비해서 사람은 먼지 같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작은 원자보다도 작은 소립자로부터 광대무변한 우주까지도 생각에 담을 수 있는 것이란다. 사람은 아주 작은 이익에 매달려 다투기도 하지만, 온 우주를 품에 넣어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존재지. 그 우주적인 사랑의 마음을 가진 이가 볼 때, 작은 이익에 매달려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하겠니?

사람의 등급은 나중에 그 판단기준을 이야기하면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바로 그 사랑의 크기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단다. 우리가 어떤 존재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에 대한 얘기인 것이지. 그러니 사람의 등급을 따져보는 일이 중요하지 않겠어?

 

사람에게도 등급이 있다는 생각은 우선 먼저 자신을 반성하게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것이다. 지금 나는 어떤 등급에 머물러 있을까 반성하게 하는 것이지. 더 높은 등급의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게 한단다. 물론 이러한 노력은 사람의 등급이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고 인격은 성숙해 가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가능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누군가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더 성숙해가지 못하고 주저앉는 경우도 있단다. 사람들은 부모의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다고 말하지. 부전자전이라고 한단다. 스승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야. 누군가 못난 사람을 만나면 사람들은 “네 부모가 그렇게 가르치던? 누가 네게 그렇게 가르쳤냐?”고 말하지. ‘개새끼’라는 욕설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생각해보면, “네가 ‘개 같은 짓(사람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걸 보니 네 부모는 개였구나.”라는 이야기고, 여기에는 “개를 부모로 둔 개의 자녀는 결코 개의 수준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그러나 사람의 등급을 가장 낮은 등급으로부터 가장 높은 등급까지 여러 단계가 있음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가장 높은 등급의 사람으로 성숙해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겠니? 우리의 눈은 가장 높이 있는 ‘신의 경지’, 하느님처럼 되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될 것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은 그래서 가능해지게 된단다. 부모보다 스승보다 뛰어난 경지에 도달하는 것, 청출어람(靑出於藍)!

어떤 종교인들은 신의 경지를 넘보는 것, 하느님처럼 되어가려고 노력하는 일을 매우 불경스런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노력을 금지시키려 한단다. 성경에는 바벨탑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벨탑은 하느님의 자리를 넘보다 멸망당한 사람들 얘기로 흔히 거론된단다.

그러나 생각해보렴. 진정 하느님이 계시다면 하느님은 무엇을 원하고 계실까? 석가모니가 지극히 높은 깨달음을 얻고서 어리석은 중생들을 불쌍히 여기며 가르치고자 한 이유가 무엇이었나?

석가모니가 사람들에게 목표로 제시한 것은 자신처럼 지극히 높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것이었고, 그래서 불교인들의 최고의 덕담은 “성불(成佛)하세요!”라는 인사란다.

기독교도 알고 보면 마찬가지야. 바벨탑 이야기는 아직 소인배 수준에 머물러 있는 인간이 감히 하느님의 자리를 탐내는 것을 벌한 이야기지, 하느님의 마음을 품지 말라는 가르침이 아니란다. 기독교도 창조이야기를 통해 사람이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하느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의무요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라고 우리가 나아갈 목표를 제시하고 있단다.

신의 경지보다 더 높은 경지는 없겠지만, 심지어 예수님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이요, 그보다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말씀하기도 했다.

사람의 인격수준이 벌레 같은 수준으로부터 하느님의 경지까지 여러 단계로 구분될 수 있다는 생각은 나의 현재 수준을 돌아보게 하고 하느님의 경지로 나아가도록 부추긴다.

세계 4대 성인(聖人) 가운데 한 분으로 손꼽히는 소크라테스는 “네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말의 핵심은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잘 파악하라”는 이야기인데,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면 바로 그것을 알기 위하여 노력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지. “내가 뭘 모르는지 알지만, 내 버려둬. 그 까짓 것 모른 채로 살면 어디가 어때서?”라고 버티는 사람들도 물론 있겠지만, 노력하면 알아낼 수 있는데도 그렇게 버틴다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 아니겠니?

사람의 등급에 대해서 아는 일은 더 높은 수준의 인격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게 만든단다.

 

사람의 등급에 대해서 아는 일은 또 <어떤 이들>의 인격수준을 평가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물론 다른 이들의 인격을 평가하는 일은 극도로 신중해야 하는 일이다. 함부로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은 모든 성인들의 가르침 속에 들어 있는 얘기란다. 그 이유는 사람들을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가지고 판단하기 어려운 것도 있지만, 우리들의 판단이 그 사람의 발전 가능성을 옭아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의 ‘겉으로 드러난 모습’이 뜻하는 것은 외모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의 옷차림, 그 사람의 분위기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언행도 그 사람이 겉으로 드러낸 모습에 해당한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처럼, 어떤 이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한 이유를 우리는 100% 장담할 수 없는 법이다. 어떤 사람의 인격을 판단할 때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은 그 사람이 보여준 말과 행동일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런 언행을 보여준 이유를 함부로 속단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다른 사람의 인격판단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우리의 인격판단은 그 사람에게는 족쇄가 되기 쉽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충고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너는 그 정도 인간이야.”라는 비난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래서 “아니야 나는 더 훌륭한 인간이 되겠어!”라는 마음을 불러일으키기보다 오히려 “그래 나는 그런 인간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너는 별 수 있어? 어차피 똑같은 주제에!”라고 반발하게 하기가 쉽다. 자신의 인격을 고양시키기보다 비난하는 사람의 인격을 깎아내려 서로 인격의 하향평준화를 향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법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의 인격수준을 평가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사람의 등급을 아는 일이 중요하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선거와 관련된 얘기다. <어떤 이들>이란 바로 선거에 후보로 나선 이들을 뜻하는 것이다.

선거는 그 사회의 중요한 역할을 할 사람을 뽑는 일이다. 우리는 그 역할을 하게 될 사람들을 그 사회의 지도자라고 부른다. 사실은 그 사회의 분배를 결정하는 권력을 위임하는 일인데, 그 권력을 어떤 사람에게 위임해야 하는가?

나중에 또 얘기하겠지만 기껏해야 소인배(小人輩) 수준의 인격을 가진 이가 그 사회의 지도자가 되었을 경우 그 사회의 구성원들은 심한 고통을 겪기 마련이다. 그 사회의 경제적인 부는 그 소인배 무리들에게 집중되고 그 소인배 무리에 끼지 못한 사람들은 온갖 착취를 당하게 된다. 아직 원수를 사랑하는 경지까지 이르지는 못한 ‘선린(善隣)’ 수준의 인격을 가진 이가 지도자가 되었을 경우에도 그 사회는 전쟁의 위험을 피해가기 어렵다.

따라서 선거를 앞두고 있을 때는 그 선거에 나선 모든 후보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인격 평가를 해야 한다. 그게 비록 그가 보여준 겉으로 드러나 언행만을 근거로 할 수밖에 없는 평가일지라도 그 사람의 등급을 일단 평가해야 한다. 선거에 나선 후보들은 그래서 그의 모든 것이 낱낱이 까발려지기 마련이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걸 각오하지 못하는 사람은 ‘군자(君子)’라고 할 수 없다. ‘군자(君子)’란 사회의 지도자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격자라는 의미를 가진 말이다.

할애비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기는 박근혜라는 대통령이 국회에서탄핵을 당해 헌법재판소가 그 탄핵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느냐 마느냐를 검토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탄핵될 것으로 믿고 있었고, 다음 대통령을 누가 하느냐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지. 이때 UN사무총장에서 금방 물러난 반기문이라는 사람이 후보감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본인도 후보로 나서볼까 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시작했단다. 그런데 그 사람은 곧 중도에 포기했지. 그 사람은 가까운 친척들의 잘못은 물론이고 그 사람의 행적도 사람들에게 비판 대상이 되었단다. 결국 그 사람은 자신에 대한 비판을 ‘인격살인에 가까운 음해와 각종 가짜 뉴스’라고 비난하면서 “난 그런 것을 못 견디겠다!” 항복선언을 하고 물러났지. 그 사람은 결코 ‘군자(君子)’의 인격이 아니었던 거야. 오히려 그 시절의 출세한 이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인배에 가까운 인격에 불과한 사람이었는데, 그것을 잘 포장하여 군자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에 뛰어난 인었는지도 모르지. 그저 아부만 좋아하는 사람들.

아무튼 선거는 ‘자신의 인격 수준을 군자인 것처럼 잘 포장하는 기술을 가진 사람들’과 ‘진정 군자인 사람, 또는 끊임없이 성인군자의 수준으로 자신의 인격을 업그레이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구별해내는 일이 매우 중요하단다. ‘진정 군자인 사람, 또는 끊임없이 성인군자의 수준으로 자신의 인격을 업그레이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사람들을 착취하는 사회 시스템을 개혁할 수 있고,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지.

할아버지는 네가 사는 세상에는 할아버지 때보다 성인군자의 인격수준을 가진 이들이 더 많아져서 그런 이들이 사회의 지도자로 선출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자, 오늘 이야기를 잘 정리해보렴. 사람의 등급을 평가하는 일이 왜 중요할까? 다음부터는 이제 사람의 등급을 판단하는 기준, 곧 인격판단기준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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