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교실/사람의 등급

사랑하는 단(亶)에게(사람의 등급⑥ / 두 가지 고정관념)

도덕쌤 2017. 2. 21. 01:12

사랑하는 단(亶)에게

 

 

 

아직 이 편지를 읽기에는 너무 어린 너이기에 할아버지가 조금 게으름을 떨었나보다. 한 동안 생각만 많았구나.

오늘 네가 편도선염으로 목이 부어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네 몸에 면역력, 저항력이 강해져서 병마와 싸워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쓴다.

하루빨리 이 사진처럼 흥겨움을 참기 힘들어 포효할 만큼 즐거운 시간이 다시 오기를...

 

지난 편지에선 ‘존경’한다는 말을 설명하면서 인격판단의 기준이 선악판단기준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내비쳤다. 바로 여기서 편지를 시작해야 하는데, 그전에 먼저 ‘존경 - 닮고 싶어 하는 마음’과 관련해서 다시 한 번 강조하자.

전에도 얘기했지만 일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닮는 것, 하느님의 경지에 이르려는 것을 엄금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제사장들과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단(亶)아, 우리가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그 하느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게 우리의 임무임을 잊지 말자. 소인배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 하느님의 자리를 탐내는 게 문제일 뿐, 정말 하느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한 사람은 예수님처럼 겸손하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할 뿐이다. 네가 기독교인으로 성장했다면 이것을 잊지 마라. 예수님은 당신만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까지도 하느님의 자녀라고 말씀해 주셨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독생자라는 얘기다. 예수님은 외아들이 아니었던 거야. 예수님을 숭배하게 되더라도 제발 그분을 닮아가도록 노력해라.

 

이제 본격적으로 선악판단기준에 대해 얘기를 시작하자.

‘훌륭하다-썩 좋아서 나무랄 곳이 없다-좋다(선(善))’ 여기서 선악판단의 얘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선악판단기준이란 무엇이 좋다거나 나쁘다고 판단하는 기준을 뜻한다.

자, 너는 무엇이 좋다 나쁘다는 판단을 어떻게 내리고 있었니? 사람들은 이 판단을 실제 어떻게 하고 있을까? 네가 이 글을 읽을 때는 사전에 어떻게 설명되어 있을지 궁금하다.

지금 이 시대의 사전을 찾아보니 NAVER 사전에는 [좋다 : 1. 대상의 성질이나 내용 따위가 보통 이상의 수준이어서 만족할 만하다. 2. 성품이나 인격 따위가 원만하거나 선하다. 3. 말씨나 태도 따위가 상대의 기분을 언짢게 하지 아니할 만큼 부드럽다.] [나쁘다 : 1. 좋지 아니하다. 2. 옳지 아니하다. 3. 건강 따위에 해롭다.]라고 하고 있구나.

DAUM 사전에선 [좋다 : 1.(무엇이)성질이나 내용이 보통 이상이거나 우수하다. 2.(사람이 어떤 대상이)마음에 드는 상태에 있다. 3.(무엇이 어떤 일에)잘 어울리거나 알맞다.] [나쁘다 : 1.(무엇이)성질이나 내용이 보통보다 낮다. 2.(언행이)도덕적으로 옳지 않다. 3.(어떤 것이 다른 것에)해가 되는 점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좋다는 말은 결국 마음에 드는 것, 만족할 만한 것을 두고 하는 말로서 그 수준이 보통 이상일 때 쓰는 말이고, 나쁘다는 말은 좋다 또는 옳다라는 말의 반대말로서 해롭다는 뜻까지 포함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좋다 나쁘다’라는 판단이 절대적인 판단 또는 객관적인 판단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판단의 주체가 되는 사람마다 판단이 다르다면 이러한 판단은 상대적인 판단, 주관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있겠지?

좋다, 나쁘다는 판단이 마음에 드느냐, 만족할 만한 것이냐에 달려 있다는 것은, 우선 이러한 판단이 각자의 주관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도덕과 윤리를 말할 수 있을까? 인격자가 되라고 가르치는데, 어떤 분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그 분을 본받자고 하는 말이 어떻게 가능할까?

1+1=? 1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3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1이나 2나 3이나 그 무엇도 답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정답은 2라고 해야겠지? 그런데 예를 들어 석가모니를 어떤 사람은 사기꾼으로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거룩하신 분으로 존경한다고 했을 때, 그때도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정답은 거룩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1+1=2라는 것도 우리의 수학적인 사고, 곧 관념 속에서만 그런 것일 뿐, 사실은 1이 될 수도 있고, 3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는 0이 될 수도 있다고 얘기한다만, 할아버지가 묻고 싶은 것은 우리가 도덕적인 사고 도덕적인 관념 속에서라도 (수학적인 관념의 세계에서처럼) 석가모니를 거룩한 분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 있냐는 것이다.

 

너무 얘기가 어려운 방향으로 흘렀나? 할아버지의 어릴 적 얘기를 해볼게.

할아버지는 어릴 적 친구들과 자주 싸웠단다. 친구들은 할아버지에게 ‘이기적인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댔지. 할아버진 친구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가 이기적이라는 비판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고, 또 이기적인 게 나쁜 것처럼 말하는 태도도 마음에 안 들었지. 할아버지도 친구들의 하는 말과 행동이 마음에 안 들었으므로 친구들에게 “니네가 나쁜 놈들이야.”라고 소리쳤었어.

그러나 곧 할아버진 ‘이기적인 것은 나쁜 것’이라는 판단이 거의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판단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굳어진 고정관념이었어.

 

고정관념이란 말은 “마음속에 굳어져 버린 생각”으로, “어떤 집단의 사람에게 있어서 단순하고 지나치게 일반화된 생각”을 말하는데, 흔히 “무언가 문제가 있는 사고방식”이란 느낌을 주는 말이란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의할 것은, 고정관념이란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른다는 점에서, 무조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버릴 것이 아니라, 깊은 반성위에서 참뜻을 이해하고 사용해야 하는 말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기적(利己的)인 것은 악(惡), 이타적(利他的)인 것은 선(善)”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는데,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인지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야. 그리고 무조건 그렇게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예외적인 경우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얘기지.

 

할아버지는 또 하나 사람들의 선과 악에 관한 고정관념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칭찬받고 싶어서 하는 ‘착한 짓’은 위선(僞善)”이라는 생각이었어. ‘위선(僞善)’이라는 말은 가짜 선행이란 얘기로 ‘나쁜 짓’에 가깝게 들리는 말이지. “너는 위선자(僞善者)야!”라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욕에 가까운 말이야.

할아버지가 이 고정관념을 발견하게 된 것도 친구들과의 다툼을 통해서야. 할아버지가 어릴 때는 학교 교실을 학생들이 당번을 정해 청소를 했었거든. 청소당번인 날 우리는 청소보다는 놀이에 팔려 있을 대가 많았어. 그러다가 선생님이 들이닥치면 모두 혼나는 거지. 그런데 할아버지는 선생님이 들이닥치는 기미를 주의 깊게 살폈거든. 그래서 친구들과 놀다가도 선생님이 들이닥칠 것 같으면 바로 노는 걸 중지하고 청소를 열심히 했던 거야. 친구들에게는 선생님 오신다고 큰소리로 알릴 수 없었지. 선생님이 또 이 녀석들 지금껏 놀다가 선생님이 오시니까 청소하는 척 하는구나 금방 알아채실 테니까. 결국 눈치 빠른 할아버지와 할아버지 주변의 몇몇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노는 데만 정신이 팔린 친구들은 선생님에게 혼이 나곤 했어. 그런데 바로 그 혼난 친구들이 할아버지에게 했던 얘기가 바로 이것이었지. “야! 이 위선자야!” 때로는 선생님께 할아버지도 함께 놀다가 선생님이 오시니까 청소하는 척했다고 이르기까지 했단다. 나중에는 친구들과 놀지 않고 청소만 했는데도 “실은 저도 놀고 싶으면서 선생님께 칭찬받고 싶어서 청소를 열심히 하는 척한다.”고 비난하는 친구들도 있었지.

중학교에 올라가니까 그때 도덕교과서에 할아버지가 경험한 얘기들이 나왔단다. “어떤 사람의 행위가 진정으로 선한 행위인가 판단하려면 그 행위의 동기와 결과를 모두 살펴보아야 한다.”는 얘기였어.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할아버지처럼 ‘칭찬받고 싶어서 한 착한 짓’은 진정한 선행이 아니라는 거야. 진정한 선행이 아니라면 그게 뭐야? 결국 위선이라는 얘기지.

 

할아버지는 자존심이 상했어. 기껏 착한 짓을 했는데 위선자라고 욕만 먹고, 자기들이 눈치 없이 행동해서 혼나고서는 함께 혼나지 않았다고 할아버지만 이기적인 놈이라고 손가락질하는 친구들이 미웠단다. 돌이켜보면 친구들이 할아버지를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 한 이유는 할아버지가 워낙 가난해서 돈을 쓸 줄 몰랐던 때문이었을 거야. 친구들이 군것질할 때는 옆에서 얻어먹으면서 할아버지는 친구들에게 무얼 사주는 법이 없었거든. 어쩌다 용돈이 생겨도 아끼고 아껴 썼지. 군것질이 하고 싶으면 혼자서만 살짝 숨어서 했을 거야. 그러니까 친구들은 할아버지의 가난을 이해해주기 보다는 할아버지가 이기적인 놈이라고 판단했던 거지.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것마저도 억울했을 거야. 가난한 게 자존심이 상했던 거지.

할아버진 자존심이 상해서 더욱 “이기적(利己的)인 것은 악(惡), 이타적(利他的)인 것은 선(善)이라는 고정관념과, “칭찬받고 싶어서 하는 ‘착한 짓’은 위선(僞善)”이라는 고정관념, 두 개의 고정관념과 씨름을 했단다. 한 때는 “그런 생각이야말로 주관적인 판단 아니냐?”고 대들기도 했고, “사람은 결국 따지고 보면 누구나 이기적이지 않느냐?”, “사람이 착한 짓을 하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결국 누군가의 칭찬을 받고 싶어서 하는 짓 아니냐?”고 대들기도 했어.

 

그러다가 깨달았지. 할아버지는 사람들의 선악판단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깨달았어. 그리고 제멋대로 주관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절대적인 입장에서 판단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단다. 앞에서 어려운 얘기를 했었는데, 할아버지는 1+1=2처럼 분명하게 사람들의 선악을 판단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생긴 거야.

그 얘기는 다음 편지에 할게. 편지가 너무 길면 읽기 힘들 테니까. 얘기가 재미있으면 금방 다음 편지도 읽어도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