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교실/사람의 등급

사랑하는 단(亶)에게(사람의 등급④ / 인격판단기준)

도덕쌤 2017. 2. 8. 22:52

사랑하는 단(亶)에게



단이 보고싶다고 했더니 어제는 가족카톡방에 엄마가 네 사진을 올려주었다. 네가 책을 보고 있는 모습과 요구르트를 먹는 사진이다. 책을 거꾸로 들고 있는 네 모습에 고모가 “ㅋㅋ 거꾸로 읽기까지 하다니.. 공간지각능력천재”란다. 요구르트 먹는 모습은 그제 본 동영상의 ‘박력터지게’ 먹는 모습인데, “원샷!”

아무튼 무럭무럭 자라서 할아버지가 쓰고 있는 이 편지글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어서 오기를 기도한다. 또한 그때까지 이 할아버지도 살아 있어서 네 물음에 답해줄 수 있기를 ---.

 

지금까지 ‘인격(人格)’이란 ‘사람의 등급’을 뜻하는 말로 이해하자고 했고, 그 등급을 드러내는 여섯 단계의 표현을 보았으며, 등급을 매겨보는 일을 거부하는 이유들을 살펴보면서 이를 비판하고, 사람의 등급을 매겨보는 일이 왜 중요한지 설명했다. 이제 그 구체적인 판단기준, 인격을 판단하는 기준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먼저 곧바로 결론부터 들려주마. 그 결론이 나오기까지의 자세한 과정은 천천히 설명할게.

지난 세 번째 편지에서도 살짝 비쳤듯이, 인격이란 ‘사랑의 넓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단다. ‘우리가 어떤 존재까지 사랑할 수 있을까’에 대한 얘기인 것이지.

사람은 사회적 존재라서 누구나 자신을 중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우리’라고 부르는 세계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 ‘우리’라는 표현은 단순히 ‘1인칭 복수 대명사’로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끌리어 사랑하게 된 어떤 사람들’이란 것을 강조하기 위해 할아버지는 ‘☉人리’라고 적고 싶다. ('☉人'를 한 글자로 읽어주기 바란다. '우'라는 글자가 비스듬히 누웠는데, 가운데 자기자신을 뜻하는 점이 하나 찍혀 있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우리")

이 ‘☉人리’라는 세계는 그 중심에 항상 자신이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공통적이지만, 실상은 사람마다 달라서, 어떤 사람의 ☉人리안에는 온 우주가 다 담겨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의 ☉人리안에는 자기 자신밖에 없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人리에는 어떤 사람들까지 포함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그 사람의 인격을 알 수 있다.

가장 낮은 등급의 인간인 ‘식충(食蟲)’의 ☉人리 안에는 그 자신 하나밖에 없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부모형제자녀까지도 해칠 수 있는 사람이다.

‘금수(禽獸)’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의 ☉人리 안에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그가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들’, 간단히 줄여 말하면 ‘은인(恩人)’들 까지 들어 있다. 짐승들도 은혜를 알고 갚기도 한단다. 그러니까 직접적인 도움을 받고도 고마워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러나 이 사람들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서 서로 낯익은 사람들까지 사랑하지는 못한다. “각자의 문제는 각자가 해결해야한다.”고 말하면서, 이웃의 문제해결을 위해 자신의 것을 대가없이 내어놓지 못한다.

‘소인배(小人輩)’들은 원수지지만 않았다면 낯익은 사람들 정도까지는 어느 정도 도우며 살아간다. 대가가 없더라도 자신에게 있는 것을 조금은 내어줄 줄 안다. 그러나 낯선 사람들은 무척이나 경계하지. 혹시 우리에게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닐까 의심하며, 오랜 시간을 관찰하여 드디어 적(敵)이 아니라는 확신이 생기고 낯이 익었다 싶을 때까지는 섣불리 대가 없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

‘착한 이웃(선린:善隣)’은 낯선 사람들일지라도 함부로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낯선 이가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살피며 그와의 거리를 좁히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그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를 해치려고 하는 이’들, 적(敵) 또는 원수(怨讐)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군자(君子)’는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를 해치려고 하는 이’들, 적(敵) 또는 원수(怨讐)까지도 그들이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도움주기를 거절하지 않는다. 군자는 그 기회를 오히려 적대관계를 해소하는 기회로 삼고자 하며, 그래서 그들은 평화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적이나 원수에게도 공평하게 대하는 사람들이다. 평등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지. 그래서 군자는 한 사회의 지도자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인(聖人)’은 한 사회의 지도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모든 인류의 스승으로 삼을 만한 분들이다.

할애비는 줄곧 ‘☉人리’라는 세계의 넓이를 가지고 인격을 말하고 싶어서 “이 분들의 ‘☉人리’라는 세계에는 모든 생명이 담겨 있다.”고 설명해 왔었다. 그런데 그동안 줄곧 사람들을 중심으로 설명해 오다가 성인에 와서야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라고 얘기하는 게 좀 이상하지 않니? 할애비의 생각이 인간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는 것을 반성하며, ‘모든 생명’과 각각의 등급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았단다. 짐승같은 사람도 고마움을 느끼는 짐승에 대해서는 사랑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사람만이 아니라 다른 생명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도 각각의 등급에 따라 같은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사랑하는 대상을 표현하는 설명, ‘☉人리’라는 세계 안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들을 ‘☉人리’라는 세계 안에 포함되어 있는 ‘생명’으로 바꾸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성인(聖人)’을 설명할 때 위처럼 ‘모든 인류의 스승으로 삼을 만한 분’이라고 표현을 바꾸었다. ‘모든 인류’라는 표현은 지금 현재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것이지. 미래의 후손들이 겪게 될 고통까지도 내다보며 그 고통을 줄이기 위해 현재의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가르침을 준 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인(聖人)’보다 더 높은 ‘격(格)’이 있다면 뭐라 부를 수 있을까? 그런 분이 있다면 우리는 그 분을 신(神)으로 섬기지 않겠니? 그것도 잡신(雜神)이 아니라 절대자(絶對者)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 과거, 현재, 미래 온 우주의 모든 존재를 아끼고 사랑하는 분. 우리는 그런 분을 일컬어 하느님, 영어로 God이라고 말한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진정 하느님의 경지에 도달한 분으로 섬겨지는 분은 역사상 석가모니와 예수, 두 분이 있단다. 또 다른 종교에서도 신처럼 떠받드는 분들이 있긴 하지만, 그 종교 안에서의 설명을 들어보면 대체로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 사람 정도, 위대한 스승 정도로 여기는 것이 적당한 분들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사이비 종교의 교주들이 스스로 신격화하고 있지.

자, 이제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간단히 표로 나타내보자.

인격의 등급

리’안에 있는 사람들

신의 경지

과거, 현재, 미래, 온 우주의 모든 존재

사람

다운

성인

(聖人)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사람

군자

(君子)

자신,가족,은인,낯익은,낯선, + 원수

선린

(善隣)

자신,가족,은인,낯익은(원수제외) + 낯선 사람

소인

(小人)

자신,가족,은인 + 낯익은 사람(원수제외)

사람

답지

못한

금수

(禽獸)

자신 + 가족과 은인(恩人)

식충

(食蟲)

자신

 

사랑하는 단(亶)아, 어떠니? 공감이 가니?

할아버지는 네가 이 이야기를 “인격이란 ‘사랑의 넓이’를 의미한다.”는 정도로 받아들이고, 또 “단(亶)아, 너는 어떤 사람까지 사랑할 수 있겠니?”라는 질문으로 새겨듣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단다.

 

사실 인격판단기준으로 삼을 만한 것들에는 다른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단다. 욕망을 절제할 수 있는 능력과 실천도 중요한 판단근거가 될 수 있다. 참된 지혜, 깨달음의 수준도 생각해 볼 수 있어. 그러나 모든 성인들의 가르침을 종합해보면 할아버지의 얘기가 가장 중요한 판단기준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의 설교와 강연을 들어보았는데, 할아버지처럼 명쾌하게 정리해주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할아버지와 같은 깨달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당장 구체적인 사례를 소개하려니 막연하다만, 옛날 도덕교과서의 ‘소아(小我)와 대아(大我)’라는 표현이나, 할아버지의 친구가 늘 강조하던 ‘더불어 함께’라는 슬로건 같은 것들도 이런 깨달음이 있어서 나온 얘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되고, 내일부터 할아버지가 다녀올 사단법인 ‘한몸평화’의 영성수련회가 슬로건으로 제시하고 있는 ‘한몸평화’도 이런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성경의 가르침, 공자의 가르침, 부처의 가르침도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모든 가르침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 상통한다. 그런 점에서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할아버지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닌 셈이지. 다만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게 되기까지 할아버지의 독특한 생활경험이 있었던 것 뿐이야.

다음 편지에서는 오늘 편지에서 결론적으로 제시한 판단기준을 생각해내기까지 어떤 생각의 과정을 거쳤는지, 그 생각의 전개과정을 들려주마. 기대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