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교실/사람의 등급

사랑하는 단(亶)에게(사람의 등급⑦ / 동기와 결과)

도덕쌤 2017. 2. 21. 01:19

사랑하는 단(亶)에게


단아, 이 사진의 꽃이 이름이 뭔지 아니? 글쎄 ‘큰개불알꽃’이란다. 봄소식을 알리는 이 앙증맞고 신선한 꽃에 ‘개불알’이 뭐야, 도대체! 그래서 또 검색을 했단다.  검색을 해보니 글쎄 이런 이름은 일본사람들이 붙여놓은 거래. 나중에 열매가 생기면 아주 작은 열매가 생기는데, 그 모양이 개불알을 닮았다고 붙인 이름이래. 우리나라에선 그 이름을 그대로 번역해서 사용중이고.

일부에선 이렇게 아름다운 꽃에다 이름이 그게 뭐냐고 이름을 바꾸자고 해서 ‘봄까치꽃’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이 꽃은 [큰봄까치꽃]이라고 알아두면 좋겠어. 영어로는 [bird's eye]고, 학명으로는 Veronica polita인데, 꽃잎 속을 들여다보면, 눈물을 훔치던 성녀(聖女) 베로니카의 손수건에 나타났다는 '광배(光背)가 빛나는 예수님의 환한 얼굴'을 떠올리게 되어 이런 학명을 붙였댄다.

하도 꽃이 작아서 크기를 비교해보려고 할아버지가 50원 짜리 동전(네 시대에도 통용되는 화폐일지 모르겠네)을 놓고 찍어보았어.


어때? 재밌니? 이제 내일이면 할아버지는 실상사를 떠나 잠시 네가 있는 서울에 올라갈 텐데, 올라가기 전 할아버지가 먼저 보내는 선물로 봄소식을 알리는 거야.

 

지난 편지에선 두 가지 고정관념을 소개했었지. 그 고정관념과 씨름하는 과정에서 할아버지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이제 그 이야기를 시작할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어떤 사람의 행위가 진정으로 선한 행위인가 판단하려면 그 행위의 동기와 결과를 모두 살펴보아야 한다.”는 얘기야. 이 말은 동기도 좋고 결과도 좋아야 진정한 선행이라는 얘기지. 이 주장은 옳은 이야기란다. 항상 옳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도덕판단의 원리라고 할 수 있지.

자, 더 깊게 살펴볼까? 동기는 나쁜데 결과는 좋다든지, 동기는 좋은데 결과는 나쁜 경우가 있는지 생각해보렴. 할아버지는 좋은 사례를 찾아냈는데, 우선 누구를 죽이는 행위는 나쁜 짓이라는 것을 절대적인 도덕판단으로 인정해보자. 반대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행위나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행위는 선한 짓이라고 할 수 있겠지.

여기서 ㉠누군가를 죽이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 사람을 도와준 결과가 되었다거나, ㉡누군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려 했는데 오히려 더 빨리 죽게 만든 경우를 생각해보자. 종합적으로 선악판단을 해보렴.

동기를 중시하는 사람은 ㉠은 나쁜 짓, ㉡은 그래도 비교적 착한 짓이라고 생각할 거다. 결과를 중시하는 사람은 그 반대겠지? 그런데 엄중하게 객관적으로 판단하면? 둘 다 나쁜 짓이란다. ㉠의 경우 우리는 살인미수로 처벌하고, ㉡의 경우에는 과실치사로 처벌하고 있지. 이것은 아예 법률로 그렇게 정해놓고 있는 거야. 물론 ㉢죽이려 했고 결국 죽이는데 성공한 경우에는 고의적인 살인으로 가장 무거운 처벌을 하고, ㉢에 비해서 과실치사나 살인미수는 가벼운 처벌을 한다.

그럼 과실치사와 살인미수는 어느 것을 더욱 무겁게 처벌할까? 과실치사의 경우 그 실수가 얼마나 심각한 실수인가를 또 따져야 하겠지만, 또 살인미수에 대해서도 사람을 죽이려고 했던 그 마음을 얼마나 깊이 반성하고 있는가도 따져봐야 하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살인미수를 과실치사보다 더 무겁게 처벌하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그 이유가 또 뭘까?

그것은 동기가 가진 속성 때문이란다. 사람의 행위의 동기가 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동기는 그 사람의 의지, 목적의식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기는 목표한 결과를 이룰 때까지 계속해서 작동하는 힘을 갖고 있다.

선한 동기를 가지고 한 일인데 실수로 나쁜 결과를 가져왔다면, 사람은 그 실수에 대해서 반성을 한다. 그 실수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고, 가능하면 실수하기 이전의 상태로 원상회복시키려는 마음을 품게 되지.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 다시 담을 수 없더라도 최소한 책임감을 가지고 보상이라도 하려 하는 것이다.

악한 동기를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 번 실수로 원하는 악한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고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란 드물다. 원하던 악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반복해서 시도를 하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중도에 살인의지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체포되어 처벌받기에 이르는 것이지, 들키기 전에 중간에 반성하고 포기했다면 아예 문제가 되지도 않았을 거다. 다만 본인 스스로 악한 동기에 대해 잘못했다고 반성하고 있는 것 뿐이지.

사람의 행위에 대한 선악판단을 할 때, 그 동기와 결과를 모두 살펴야 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동기와 결과 중에 그래도 동기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여기서 이 원리를 가지고 “칭찬받고 싶어서 한 착한 짓”에 대해 적용해보자. 이에 대한 종합판단을 진정한 선행이 아닌 ‘위선(僞善)’으로 판단하는 이유가 뭘까?

결과는 ‘착한 짓’이라고 했으니 좋은 결과인 게 틀림없지. 이를테면 할아버지가 선생님이 오시는 걸 눈치 채고 청소를 열심히 한 것, 청소를 열심히 한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런데 동기가 문제지.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동기인데, 이 마음을 ‘나쁜 마음’이라고 할 수 있겠니? 이 마음을 좋은 마음으로 이해한다면 누군가 칭찬을 기대하며 착한 짓을 했을 때, 우리는 기꺼이 그를 칭찬할 것이다. “정말 착한 행동을 했구나!” 이것을 위선으로 이해하는 이유는 그 동기를 나쁜 것으로 보았기 때문 아닐까?

할아버지의 중학교 때 도덕교과서는 이에 대해 동기가 ‘순수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동기가 불순(不純)하다’는 얘긴데, 이것은 그냥 청소를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에서 청소하라는 얘기밖에 안 되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누군가 한 사람이 양보하거나 희생해야만 하는 상황을 만났을 때, 그때 자발적으로 양보하거나 희생하는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때도 생각해보렴. 그럼 이때 자발적으로 양보하거나 희생하는 사람은 그 양보와 희생이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일까? 양보나 희생이라는 말은 처음부터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판단으로부터 “할 수 없지 뭐. 내가 십자가를 질 수밖에.”라고 체념하며 하게 되는 것이 양보와 희생인 거지. 그런데도 이때 그를 위선자라고 손가락질 하지 않고 정말 착하다고 칭찬하는 이유가 뭘까?

 

할아버지는 여기서 “칭찬받고 싶어서 하는 착한 짓은 결국 위선”이라는 고정관념은 바로 “이기적(利己的)인 것은 악(惡), 이타적(利他的)인 것은 선(善)이라는 고정관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이기적(利己的)인 것은 악(惡), 이타적(利他的)인 것은 선(善)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칭찬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타적이라기보다는 이기적인 마음에 가깝지. 자발적으로 희생과 양보를 하게 될 때에도, 어쩔 수 없다는 판단의 밑바닥에는 이기적인 마음보다 함께하고 있는 공동체를 위하는 이타적인 마음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 행동은 이타적인 동기에서 이타적인 결과를 가져온 행위라고 판단하는 것이지.

선악판단에 있어서 가장 뿌리 깊은 고정관념은 “이기적(利己的)인 것은 악(惡), 이타적(利他的)인 것은 선(善)이라는 고정관념이었던 거야.

 

할아버지는 여기서 물었어. 이기적인 게 왜 나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기본적인 것 아니야? 칭찬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왜 나빠? 당신들에게는 칭찬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없어? 당신들은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지 않아?

이렇게 묻고 보니 할아버지의 질문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질문이 되고 말았어. 할아버지의 질문은 마치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 칭찬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 이러한 인간본성에 대해서 나쁘다고 말할 사람 있어?”라고 묻는 것과 같았다. 할아버지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믿는다고 고백한 셈이지.

그런데 또 여기서 “인간의 본성이 선하냐?”는 반격을 받았다. 세상에는 성선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성악설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던 거지. 심지어는 양면설을 주장하거나, 백지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어.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이라고 얘기하는 종교, 종교(宗敎)의 종(宗)은 근본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교(敎)는 가르침을 뜻하는데, 종교적인 교리조차도 헷갈리게 하고 있단다.

기독교의 교리 중에는 원죄설(原罪說)이 있다. 어거스틴이라는 중세의 신학자가 원죄교리를 설파한 후 기독교의 교리로 굳어졌지. 이에 따르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야. 성악설이지. 그런데 성경의 창세기에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대. 하느님을 절대선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은 당연히 그러니까 사람은 선한 존재로 지어진 것이라고 믿어야지. 성선설이네. 두 가지를 절충하면 결국 양면설이 될 거야.

유학의 가르침에서도 맹자는 성선설을 주장하고 맹자보다 조금 후대에 태어난 순자라는 사람은 성악설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그러니 ‘칭찬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성’,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 본성’은 선한 것일까, 악한 것일까? 죄에 뿌리를 둔 마음일까? 하느님의 형상에 뿌리를 둔 마음일까?

오늘도 얘기가 재미있었니? 너무 골치 아픈 이야기라면 네 마음속에 이런 물음표가 생길 때까지 기다렸다 읽어도 좋아. 그러나 이미 네 마음속에 이런 물음표가 생겼다면 아마 다음 편지도 후딱 읽게 될 걸? 할아버지는 네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물음표가 생겨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어주길 바래. 다음에 또 계속할게.

 

오늘 한 얘기 가운데 동기와 결과에 관한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게 표로 정리해주고 마친다.

동기

결과

사례

종합판단

죽어가는 사람을 살림

과실치사

살인미수

1급살인(고의적 살인)

최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