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백/고백 ; 기도 ; 선언 ; 설교 ; 묵상

너희가 부활시킨 그는 누구냐? (위드교회 부활절 현장예배 말씀나눔)

도덕쌤 2021. 4. 5. 15:59

마태복음 28:11~15〔경비병의 보고〕
11   여자들이 가는데, 경비병 가운데 몇 사람이 성 안으로 들어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대제사장들에게 보고하였다.
12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병사들에게 은돈을 많이 집어 주고
13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갔다' 하고 말하여라.
14   이 소문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우리가 잘 말해서, 너희에게 아무 해가 미치지 않게 해주겠다."
15   그들은 돈을 받고서, 시키는 대로 하였다. 그리고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부활절, 기독교인들이 가장 큰 명절로 지키는 이 날에 소성리 현장예배를 드릴 생각을 하다니! 눈물 시큰거리는 감동으로, 기쁨으로 여러분을 맞습니다. 할렐루야!
부활하신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만나자 하시고 먼저 가서 기다리셨다는데, 이 시대 이 나라에선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디에 가 계실까, 바로 그곳을 찾아가고자 하는 여러분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이미 그런 마음을 품고 찾아오신 분들인데 어떤 이야기로 말씀을 나눌 것인가? 여러분께는 따로 설교가 필요없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이 귀한 시간 제게 설교를 부탁하신 이유를 헤아리며, 부족한 제 생각을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신유기도에 귀를 기울인 적이 있습니다. 라디오 방송으로 환자나 보호자들의 사연을 읽어가며 신유기도를 하는 목사님들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다 어느날 문득 "예수님이 다시 살려내신 나사로는 그 후 어찌 되었나?"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그 뒤 '기껏해야 다시 죽을 육신의 질병밖에 고치지 못하는 그런 기적'이 아니라 '나의 영혼을 살리는 기적'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지요.

이런 깨달음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이 하느님과 같은 존재라는 증거'로서만 기능한다면 그저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가 기뻐하고 기념하고 야단법석을 떨 이유가 무엇인가,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냐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도 있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직전 십자가에서 얻은 상처를 실제 확인하지 않고는 못 믿겠다는 도마에게 예수님은 상처를 보여주셨지요. 그런데 바로 그 〔도마의 불신앙〕이란 제목 앞 대목에서도 예수님이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하고 인사말을 하시고 나서 두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몸의 부활, 죽기 직전의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 정말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건 마치 암으로 죽은 환자가 암세포를 그대로 간직한 채 다시 살아나야 그 암환자의 부활을 믿겠다는 태도 아닙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런 몸으로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차원을 달리하는 존재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두려워서 굳게 닫아 놓은 문을 열지도 않고 귀신처럼 나타나셨습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바람처럼 움직이셨습니다. 드디어는 구름에 싸여서 하늘로 들려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이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실증해 주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오르시기 훨씬 전부터 내려주셨던 명령 ㅡ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는 그 명령을 다시 주십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죽을지 넌지시 알려주시며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가 두려워 도망친 제자들을 다시 불러 세우시고, 당신이 짊어지셨던 사명을 이어가도록 당부하시는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사건이었습니다.

 

3년전 뉴스앤조이에 실렸던 <부활의 탈교리화>라는 글을 페북에 공유해 두었었는데, 며칠 전 페북 '과거의 오늘' 서비스가 다시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지요.
강남순 교수님의 글입니다. 
마지막 부분을 옮깁니다. 

예수 부활의 의미는 그의 '육체적 부활을 믿는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통해서가 아니라, 또는 화려한 장식과 음악이 가득 찬 교회들이 아니라, 아무도 눈 돌리지 않는 주변부에 있는 이들, 다층적 폭력과 배제와 억압을 경험을 하고 있는 이들과 함께 생명-사랑의 가치와 에너지를 나누는 현장 한가운데에서 끊임없이 경험되는 사건이 되어야 한다. 절망적인 죽음사랑의 문화 한 가운데에서, 그 죽음의 문화를 넘어서는 생명사랑의 세계를 향한 새로운 희망의 경험-- 그 경험이 기적같은 부활의 경험과 사건인 것이다.

페북그룹 [행동하는 예수]에 올라오는 <미얀마 민중을 위한 기도>에서 읽은 기도문의 한 대목입니다. 

"뻔히 죽을 줄 알면서도 부활의 주님을 믿기에 총칼에 맞서는 이들이 저기에 있습니다. 우금치마루에서, 광주에서 그렇게 하였듯이, 미얀마에서 죽음을 부활로 이겨내는 생명들을 주여, 굽어 살피소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예수님이 40일만에 구름에 휩싸여 승천하는 일로 마무리된 사건이 아닙니다.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 ㅡ 십자가가 두려워 도망쳤으나, 다시 자기들을 불러 당신의 사명을 이어가도록 당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그 명령에 사로잡혀, 그 당부를 오늘 실천하고 있는 ㅡ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사건입니다.

 

저는 오늘 소성리를 찾아주신 여러분이나 곳곳에서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기독교인들은 이미 이러한 예수 부활의 의미를 잘 찾아내고 있는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 제목으로 삼은 【너희가 부활시킨 그는 누구냐?】는 질문은 여러분을 향한 질문이 아닙니다.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아니라 걱정거리가 되어가고 있는 보수우파를 자처하는 기독교인들과 교회를 향해 던지는 질문입니다.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것으로 자기 직무를 시작하고서도, 군수산업을 위해 전쟁을 기획하고 있는, 미국의 대통령을 향해 던지는 질문이지요.
초대교회의 원시공산주의 체제를 망각하고 반공을 외치는 매카니스트 사이비 기독교인들을 향해 던지는 질문입니다.
늦게 와서 1시간 밖에 일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하루의 생계비를 품삯으로 주려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노동자들을 모두 비정규직으로 몰아세우고 인건비를 착취하는데 혈안이 된 자본의 편에 선 사이비 기독교인들을 향한 질문입니다.

 

〔경비병의 보고〕라는 소제목이 달린 오늘 본문은 예수 부활을 제자들의 사기극으로 몰아가려는 제사장들의 음모와 조작을 그리고 있습니다.
로마 황제가 임명했던 대제사장들, 그 무리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숨기고 싶어했단 이야기지요. 
오늘날 그 후예들은 더욱 교묘한 방법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 대신 엉뚱한 것을 음부에서 끌어와서 그 이름을 예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자신을 부를 때 '적'이라는 글자를 떼지 않겠습니까? 적그리스도를 추종하는 무리들은 그 정체를 이미 꿰뚫고 있으면서도 '적'자를 떼고 그리스도라고 우기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질문을 던집니다. 
너희가 부활시킨 그는 누구냐?
저들은 예수님이 이미 보혈 흘려 우리 죄를 사했으니 마음 놓고 풍요를 즐기자며 가난한 이들의 가산을 삼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신성모독이라며 죽이고자 마음먹었던 종교권력자들처럼, 그들은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노력ㅡ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을 품는 일을 불온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예수님이 해방시킨 사람들을 다시 얽매어 노예처럼 살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핍박하는 자들의 폭력에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대응했던 예수님의 길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반대자를 향해서 총칼로 대응하기를, 반대자들을 말살할 것을 선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숨겨두고 예수님이 음부에 가둔 사탄을 다시 불러내어 부활시켰습니다. 그 악마의 무리들을 부활하신 예수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얼마전 미국 국무장관과 국방부장관이 다녀간 뒤 우리 "정부가 사드기지를 방치하고 있다고 동맹으로서 용납할 수 없다고 불만을 터뜨렸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사드반대 단체와 일부 주민들의 반발을 방치하고 있다는 투로 기사를 쓰고 있었습니다. 제주지사 원희룡같은 이는 페북을 통해 "매 순간 명예롭기만 해도 힘들 군 복무가 반대 단체들의 무력시위에 눌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다. 국방 문제까지 반대 단체들의 시위 때문에 할 일을 못하고 있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냐"고 따졌답니다. 
그들은 평화행동으로 일관해 온 우리들의 시위를, 기껏해야 자기 몸을 던져 내 몸을 밟고 가라고 막아선 우리들의 저항을, 무력시위라고 매도하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팔과 다리를 꺽고 비틀어 우리를 탈진시켜 끄집어내던 경찰의 폭력은 무시하고 우리의 반발을 방치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요구는 자신들의 반대자들을 평화시위조차 할 수 없도록 원천봉쇄하라는 요구입니다. 사드기지로 통하는 이 길에,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접근을 못하도록 막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감옥에 가두거나 죽이라는 얘기 아닙니까? 인권을 들먹이며 사회주의 국가들을 비난하는 그들이 정작 제 나라 국민을 학살하라는 요구를 하는 셈입니다. 
과거 4.3항쟁 때 미 군정장관 딘 소장은 "미국은 제주도 땅이 필요하지 제주도민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했다지요. 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은 "가능한 빨리 그리고 깨끗이 해치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답니다. 사드기지를 방치하고 있다고 동맹으로서 용납할 수 없다는 미국 장관들이나, 그들의 부당한 요구에 앞장 서고 있는 부역언론 부역 정치인들은 이곳 소성리를 4.3때의 제주도처럼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저들은 사드기지 완성을 통하여, 미국과 일본을 방어하는 미사일 방어시스템을 한미일군사동맹이란 이름으로 가동하면서, 수직적인 상하관계의 최하 말단에 한국군을 두고 노예처럼 부리려 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지주, 일본은 마름, 한국은 노예 같은 관계를 강요하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는 주일미군의 주둔비까지 방위비분담금이란 이름으로 퍼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나는 저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부.활.시.킨.  그.는.  누.구.냐? 고.

매일같이 사드기지 정문앞에서 외칩니다. 
#전쟁으로_먹고_살아가는_악마들아!
#사람_죽여_돈을_버는_악마들아!
#지옥으로_돌아가라!_네_고향으로_돌아가라!
#양키_고_홈!

 

저는 1947년 3월 1일부터  시작해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이곳 소성리에서 재현하여, 사드기지 완성을 통해 수직적인 한미동맹을 한미일 삼각동맹으로까지 확대 강화하고, 한반도를 자신들의 노예로 묶어두려는 미국의 악마적인 음모에 맞서, 사드기지가 완전 백지화될 때까지 이 길을 지키겠다는 각오로 이 곳에 서 있습니다.
제 기도에 공감하시는 분들은 함께 외쳐 주십시오. 이곳에서 외치는 구호는 우리들의 외치는 기도이고, 우리들의 피켓은 바로 기도문입니다. 함께 외치는 것으로 오늘 제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전쟁으로_먹고_살아가는_악마들아!
#사람_죽여_돈을_버는_악마들아!
#지옥으로_돌아가라!_네_고향으로_돌아가라!
#양키_고_홈!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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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교회는 고신총회 경북노회 50주년 기념 개척교회로 시작하여, 이주민 노동자 의료봉사와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하면서, 사회선교에 집중하려 애쓰는 교회입니다.
2021년 소성리를 찾아주신 위드교회의 부활절 발자취를 아래에 사진으로 보여드립니다.

 

아침까지 계속 비, 땅은 젖고 꽃잎이 눈쌓인 것처럼, 게다가 꽃샘추위까지 ... 
예배장소를 기지 정문앞에서 회관앞 평화광장 안으로 옮겼습니다.
위드교회 정민철 목사님
지난주 너무 길었던 설교를 반성하며 시간을 안배하느라 노력했어요.
사드가 왜 철회되어야 하는지, 차근차근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설명 (김영재 지킴이 현장 증언)
눈길처럼 변한 사드기지로 올라가는 길. 벚꽃길을 올라
드디어 기지 정문 앞에
평화행동에 대해 안내하고 "믿음이 이기는 그날까지" 따라부르기 
평화행동, 꽃샘추위 때문에 조금 일찍 마쳤습니다. 
다녀간 흔적은 단체사진으로..
진밭교가 우리에게 얼마나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는지 알려드리고 
"평화는 얼지 않는다" 마음에 새기며 일정을 마무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