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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들, 하건이에게 / 우리는 하나, 한몸평화!

도덕쌤 2017. 2. 13. 05:58

사랑하는 아들, 하건이에게

 

실상사에서 잠시 나와 전주고백교회에서 열리는 한몸평화수련회 “야하나!”에 다녀왔다.

오른쪽 사진은 그곳까지 가는 길에 찍었던 사진들이란다. 사진을 보면 인월이라는 곳에 대보름 달집태우기를 위해 준비해둔 달집부터 전주한옥마을을 조금 벗어나서 차명자산에 있는 천주교순교자성지까지 모습이 보이는데, 그 길을 걸으면서 하느님이 내 발걸음을 인도하고 있구나, 생각했단다. 처음부터 목적한 바 없이 길을 가다가 어디를 가봐야겠다 순간순간 생각하고 걸었는데, 새로운 길이 나타나고 그 길을 걸었더니 뜻밖에 아빠가 묵상하던 주제들과 관련 있는 장소들을 만난 거지.

아무튼 한몸평화수련회에서는 우리가 자연과 더불어 모두 한몸임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불화하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았다.

다시 실상사에 돌아와서는 수련회 기간 동안 탈진한 몸을 회복하느라 편지쓰기를 잠시 쉬고 하루 온종일 쉬면서 실상사의 새벽예불과 실상사의 스님들의 법문을 묵상하며 네게 하고픈 말들을 정리해 보았단다.

이제 그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조금 길어도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보렴.

 

아빠는 그동안 네가 죽고싶다는 마음을 품었고 실제 양화대교인지 마포대교인지 한강 다리 위에까지 다녀왔다는 얘기를 들은 순간부터 자괴감에 빠졌었단다.

녹번동으로 이사오기 전에도 상담전문가를 찾아 상담도 했었고, 지금은 정신과의사를 만나 처방도 받고 그랬는데, 그것이 네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 다행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다고 빌었지만, 아빠의 블로그 주소가 ‘blog.daum.net/ask2me’이고 아빠의 아이디가 ‘ask2me’인데, 아빠는 왜 네게 도움이 되지 못할까, 반성을 많이 했지. 아빠의 자괴감을 이해하니? 그렇다고 또 네가 자책감에 빠지지는 않기를 바란다.

아무튼 아빠는 아빠가 폭력으로 너희를 교육해 왔던 것에 대해 철저히 반성을 하였다. 돌이켜보니 너희들에게는 “아빠에게는 어떤 잘못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생각을 심어주는데 불과했구나 싶다. 그게 아무리 교육적인 의도를 가졌던 것이라도, 너희들에게 용서를 빌어도 소용 없다는 생각에 빠지게 만들었다면, 사랑의 매가 아니라 사형선고에 불과한 것이었지. 차마 죽이진 못하고 때리는 것으로 그친 사형선고.

아빠는 이 점에 대해서 몇 번이고 너희들에게 사과를 해야 하고 거듭거듭 반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은 반성문 쓰는 것은 요 정도로 마치고, 아빠의 잘못보다는 우선 너의 번민에 초점을 맞춰 얘기하고 싶구나. 네가 상담전문가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는 한 번도 자세히 듣지 못해서, 네가 무슨 고민을 안고 괴로워하는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네가 그동안 아빠에게 했던 이야기를 되새기며 아빠가 받은 너에 대한 인상을 지레짐작해서 얻은 결론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가려 한다.

아빠는 네가 지나온 과거의 방황과 그로인한 시간낭비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그런 문제라면, 아빠가 몇 번씩 얘기했지만, 시간을 길게 잡고, 네 나이 또래와 경쟁하지 말고 너는 너대로 지금이라도 출발하면 되는 거니까. 아빠가 재수할 때 이야기했었듯이 네가 네 길을 찾아 떠나는데 몇 년을 더 투자하더라도, 우선 네가 가고자 하는 길을 분명하게 아는 것만으로도 우선 행복한 거란다.

네가 당장 기초실력이 부족한 걸 느끼며, 부족한 실력을 기르는 데 들어갈 시간과 노력이 엄두가 안 날 만큼 부담을 느끼는 것이라면, 그것도 역시 간단히 충고할 수 있지. 우리의 기초는 단지 어휘력인데, 네가 기본적으로 대화가 가능할 만큼 어휘력은 쌓아두고 있고,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책을 읽으며, 못 알아 듣는 단어가 나올 때를 대비하여 사전을 끼고 있으면 되는 거야.

아빠는 네가 부끄러워 말 못할 죄를 저지르고 괴로워하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 죄가 드러나 부끄러운 죄인으로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릴까 생각했을까? 만일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은 아빠가 잘못한 거지.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감싸주고 용서해주는 아빠가 아니라 냉정하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아빠의 모습만 보여준 셈이었으니!

 

아빠는 네가 세상을 끝없이 치열한 경쟁을 해야만 하는 세상, 가도가도 끝없는 경쟁속에서 결국 언젠가 패배자로 도태되어야 하는 세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절망에 빠진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또는 선과 악의 싸움에서 늘 악이 이기는 세상 아닌가 생각하고 절망에 빠진 것은 아니었을까? 아빠는 계속 더 높은 인격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자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인격이란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은데, 더 높은 인격을 갖추어간다는 것은 무한한 자기희생만 요구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너를 절망 속에 빠트린 게 아니었을까?

아빠는 지레짐작인지 모르겠으나, 네가 가진 번민이 바로 이런 문제로부터 비롯된 게 아닌가 생각하면서, 이번 편지에는 이와 같은 생각들에 대해 아빠의 대답을 들려주려 한단다.

 

먼저 아빠는 세상을 끝없이 경쟁해야 하는 세상이라고 가르치는 자본주의적인 세계관을 버려야 한다고 충고하고 싶다. 이런 방식의 세계관은 우리를 탐욕에 물들게 하지. 이런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것은 저급한 인격의 소유자들 뿐인데, 세상의 권력이 저급한 인격자들에게 주어져 있었던 결과로 마치 그것이 진실인 양 가르쳐져 왔단다. 다윈이 말하는 진화의 법칙에서 약육강식, 적자생존, 자연도태 등의 단어가 얼마나 우리에게 잘못된 사고방식을 심어주었는지!

부처, 공자, 예수의 가르침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동학사상에 이르기까지, 진실된 가르침은 우리는 모두 서로서로 연결된 존재이고, 서로 도와야하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약육강식의 경쟁이 아니라 공생관계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바른 것이라는 얘기지.

아빠가 전주고백교회까지 가서 듣고 온 ‘한몸평화사상’은 너와 내가, 우리와 우리 먹거리가, 하느님과 우리가, 모두 한 몸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성인(聖人)들의 가르침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생태환경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란다.

이것은 곧잘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말로 표현되어 왔단다. 네가 아빠이고 아빠가 곧 너라는 식으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요한복음 6장 53절부터 57절 말씀인데 이 말씀이 이해가 가니? 이 말씀은 예수와 하느님이 하나이고, 예수와 우리가 하나이며, 그러므로 하느님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진정 영원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말씀이란다. 문제는 그 ‘하나’라는 것을 어떻게 깨닫느냐는 것이지.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결코 세상을 끝없는 약육강식의 세계로 이해하지 않겠지? 깨달은 자는 세상을 끝없는 배틀로얄의 세계가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로 완성되어 가야 하는 세상으로 이해하게 되고, 그 ‘하느님의 나라’란 평화로운 세계로 생각하게 된단다. 사람들의 마음은 전쟁보다는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단다. 아빠는 너도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데, 배틀로얄의 세계에 내던져져 있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절망에 빠졌던 것은 아니었는지 짐작해본다.

사랑하는 하건아,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너는 경쟁해야 하는 세상에 던져진 게 아니었음을 생각하기 바란다. 너는 가족들에게 사랑받는 존재였고, 너의 아픔이 곧 엄마의 아픔, 아빠의 아픔, 형과 누나의 아픔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라. 너와 우리 가족이 하나였음을 기억해라. 단지 너와 우리 가족만 하나였던 게 아니다. 알고보면 세계 모든 인류가 한 가족이고, 우주의 모든 생명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가족이었단다.

오늘 읽은 실상사의 도법스님의 법문(‘법문’이란 ‘설교’의 불교식 표현이라고 생각하렴.)을 잠깐 소개할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죽음으로 인해서 영원히 끝나버리고 영원히 사라져 버리지 않습니다. 마치 바다와 파도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파도가 일어나는 것은 태어남에 비유하고 파도가 가라앉는 것은 죽음에 비유해서 이야기합니다. 바다가 움직이면 파도인 것이고, 바다가 움직이지 않으면 바다인 것이죠. 파도가 일어나는 현상을 바다의 처음이라고 이야기하고 파도가 가라앉는 현상을 바다의 영원한 끝남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요? 절대 그럴 수 없죠. 우리가 잘못 보고 있기 때문에 시작과 끝이 있다고 생각하데 그것은 그야말로 생각 중 망상일 뿐입니다. 실제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바다는 끝없이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변화하는 모습이 파도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인거죠.” (시간이 있으면 원문을 한번 찾아서 전체를 읽어보기 바란다.)☞☞☞

http://www.silsangsa.or.kr/bbs/board.php?bo_table=dharmatalk1&wr_id=260&page=2

삶과 죽음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파도와 같은 우리가 실은 바다의 일부로서 하나의 바다에 속한 존재라는 걸 이해하겠니? 아빠는 실상사에 내려오기 전부터 “모든 섬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라는 명제에 대해 생각해 오고 있었단다. 우리를 서로 별개의 존재처럼 생각하게 하는 바다나 강과 같은 것들은 무엇일까 생각해왔지.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단다. 바다나 강물은 우리를 빠져죽게 만드는 존재지. 그 죽음의 공포는 우리를 서로 별개의 존재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그 죽음을 넘어 더 깊은 곳에서 우리는 본래 하나였음을 깨닫지 못하게 하지.

사랑하는 하건아, 너와 내가 하나라는 것을 기억하자. 네 아픔이 아빠의 아픔이요, 아빠의 아픔이 네 아픔인 것을 기억하자. 아빠가 심장마비로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을 때, 스텐트시술을 해야 했던 그 때, 너는 아빠의 아픔이 너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보지 않았니? 아빠와 네가 몸이 분리되어 있고, 의지가 분리되어 있고, 의식이 분리되어 있어서, 네가 아빠가 아픈 만큼 아프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빠의 아픔이 너와 연결되어 있었던 게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니? 그렇게 우리는 하나였던 거야.

 

얘기가 길어 오늘은 이만 줄이고 다음 편지를 기약하려고 한다, 다음 편지에선 선과 악의 싸움에서 늘 악이 이기는 세상 아닌가, 더 높은 인격을 갖추어간다는 것은 무한한 자기희생만 요구되는 것 아닌가 라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마. 끝으로 다시 한 번 아빠의 매가 너희들에게 사형선고처럼 느껴지도록 했던 잘못을 사과한다,

오늘 한 얘기를 실상사작은학교라는 대안학교 화장실에 붙어 있는 표어와 한몸평화수련회에서 식사 때마다 부르던 노래 가사를 통해 다시 한 번 전하며 마친다.

“지금 네가 싸고 있는 것이 네 밥이다.”

“사랑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는 사랑이 있고

그대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는 그대가 있고//

배추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는 배추가 있고

브로콜리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는 브로콜리가 있고//

박OO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는 박OO님이 있고

이OO님 안에 내가 있고, 내 안에는 이OO님이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