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에서/어떤 분의 깨달음을 고마워하며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막1:29~39)<백창욱 목사 설교 180204>

도덕쌤 2018. 2. 5. 10:21

주일설교문(18. 2. 4) 주현절 후 다섯 번째 주일

마가 1:29-39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시사주간지 시사인에서 두 주에 걸쳐서 아동학대 탐사보도를 했습니다. 그 기사를 읽는 내내 탄식으로 숨이 막혔습니다. 학대를 넘어서 아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례들을 분석했습니다. 2016년 한 해 1만8,700명의 아이가 학대당하고 36명이 학대받다가 죽었습니다. 작년 12월 31일 아이들 엄마가 불을 내서(실화인지, 방화인지) 목숨을 잃은 광주 3남매 비극은 빙산의 일각입니다. 2014년 3월에 구미에 사는 22살 정아무개씨는 26개월 된 아들을 죽여 시신을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렸습니다. cctv를 보니, 아이 사체를 담은 쓰레기봉투를 들고 엘리베이터 안 거울을 보며 머리카락을 손질하는 모습이 찍혔습니다. 2016년 3월 부천에 사는 한 젊은 부부도 어린 딸을 학대하고 방치하다 죽였습니다. 아이는 두개골이 함몰되고 곳곳의 뼈가 부러지고 온몸에 멍이 든 주검으로 발견되었습니다. 태어난 지 84일된 아이입니다. 울산 울주군에 사는 서현이도, 평택에 사는 원영이도 부모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어떻게 부모가 이럴 수 있단 말인가 한탄이 나오지만, 비극에 대한 원인진단은 부모책임을 넘어서 다양합니다. 부모들은 벼랑 끝에 서 있는 상태였습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정신적으로 피폐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됐습니다. 연도별 아동학대 사례 건수를 보면 2001년에 2,100건인데 2016년에는 1만 8,700건입니다. 16년 사이에 90%가 증가했습니다. 이 통계는 무엇을 말하나요? 부모 개개인의 책임을 넘어서는 사회적 이유가 있다는 표시입니다.


학대 행위자 특성 중 가장 많은 건수는 첫 번째, 양육태도 및 방법 부족이 1만 6,700건, 두 번째, 사회경제적 스트레스 및 고립이 8,370건, 세 번째 부부 및 가족 갈등이 4,900건입니다. 또 학대행위자와 피해 아동의 관계는 부모가 1만 5,000건입니다. 대리양육자 2100건에 비해 부모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2016년 전체 아동 학대 사망아동 사례 중 학대행위자가 부모인 경우가 86%이고, 이 가운데 친부모인 경우가 72%에 달합니다. 슬픈 사실은 이런 모든 문제의 결과가 가장 약자인 아이에게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자신들의 억눌림, 피폐함, 스트레스를 어린 아이에게 쏟았습니다. 기사는 아이가 학대받고 죽어가는 과정에서 이 아이를 살릴 기회는 없었는가를 계속해서 묻습니다. 살아생전 그 아이가 속한 가정을 한번이라도 들여다보는 사회적 ‘눈’이 있었다면 지금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며, 사회에도 공동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세이브더칠드런에서 일했던 한 전문가는 말합니다. “가족 내에서 부모의 양육방식은 치외법권적 천륜의 영역이 아니며 인권보호를 위한 국가의 제재대상이어야 한다.”라고. “공공의 개입이 닫힌 방문 안에까지 이루어질 때에만 비로소 숨을 쉴 수 있고 자유로워지는 약자들이 가족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동학대 현실은 이 시대 귀신들림의 대표 사례라는 생각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유독 귀신들린 사람이 자주 나옵니다. 그만큼 시대가 어두웠다는 반증입니다. 로마와 이스라엘 지배세력이 민중을 폭력으로 압살하고 세금착취와 모순이 극에 달한 세상에서 귀신들린 사람이 나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도 귀신들린 사회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디 곳 하나 병들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예수시대 못지않게 지금도 하나님나라가 절실합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회당과 하나님나라를 대조합니다. 회당은 이스라엘의 공적영역입니다. 그러나 회당과 안식일체제는 제 기능을 잃었습니다. 그 와중에 민중도 떨려나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민중에게 새 대안으로 떠올랐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회당체제와 하나님나라 운동이 각각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고, 오늘 우리의 길에 교훈 삼겠습니다.


29절 첫 말씀, “그들은 회당에서 나왔다” 『유배지에서 예수읽기』에서 오늘 본문에 대해 말할 때, 복음서는 이중언어가 많다고 했습니다. ‘귀신들림, 귀신들린 자’ 모두 이중언어입니다. 이중언어를 쓰는 이유는 제국의 폭력을 사실 그대로 고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중언어나 묵시언어는 시대상황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예수일행이 회당에서 나왔다는 말도 단순히 동선이동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계속되는 말씀의 맥락을 보면 또 다른 뜻도 암시합니다. 예수일행은 시몬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습니다. 이 날은 안식일이므로 별다른 사정이 없으면 시몬의 장모도 함께 회당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열병 때문에 자리보전하고 있습니다. 즉 시몬의 장모는 회당에서 소외돼 있습니다. 사정을 접한 예수는 시몬의 장모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랬더니 열병이 떠났습니다. 치유의 결정적 원인은 무엇인가요? 예수가 손을 잡은 일입니다. 예수가 귀신들린 여인에게 다가가서 손을 잡음으로 “우리는 연결돼 있다”는 공명을 일으켰습니다. 서로 손이 통했을 때, 예수의 연민과 장모의 자연치유력이 합하여 선한 기운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나요? 당신이 이런 고통을 얻은 것은 이러저러한 일 때문이라고 원인진단분석을 하는 대신에 조용히 손을 잡아주는 일입니다. 회당은 늘 판단과 정죄를 일상으로 했습니다. 민중은 그 닦달에 늘 주눅 들었습니다. 그런 곳에서는 병을 더 얻을 뿐, 치유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예수가 손을 잡아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시중을 들었습니다. 즉 여자는 원래 하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사람을 온전하게 해서 제 자리에 있게 하는 게 하나님나라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 사회의 아픈 사람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권력의 잘못으로 일상을 빼앗긴 사람들이 제 자리로 돌아가도록, 그들이 고립되지 않도록, 연결돼 있다는 것을 느끼도록 손잡아 줘야 합니다.


그 다음 주목할 말은 “해가 져서 날이 저물 때에”(32절)입니다. 날이 저물자,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왔습니다. 처음에는 이 말씀을 그냥 단순히 현상설명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왜 해가 져서야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께 데려왔을까요? 날이 저물기 전에 데리고 나오면 안 되나요? 이 사람들은 병과 귀신이 주는 고통 때문에 한 시가 급합니다. 그러나 낮에는 안 됩니다. 왜? 안식일이기 때문입니다.(21절) 민중은 해가 질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정상사회라면, 그래서 안식일이 진정 사람을 위한 날이라면 날이 저물기를 기다릴 것 없이, 사람들이 자유롭게 치유를 위해 집을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미 형식으로만 존재하는 안식일입니다. 사람을 자유하게 하고 안식과 평안을 주는 안식일은 진즉에 사라졌습니다. 오직 지배세력의 통치만 정당화하는 껍데기 규정만 남았습니다. 껍데기 규정이지만 어겼다가는 바리새나 율법학자들에게 무슨 치도곤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민중은 해가 져서 안식일이 지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 숨을 돌리는 게 아니고 사람 숨을 더욱 옥죕니다.


회당체제는 민중을 고쳐주고 보호해야 합니다. 율법, 안식일은 민중을 구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회당체제는 이미 민중보호기능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민중은 할 수 없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명사람 예수께 몰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는 일일이 병자를 고치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그들을 온전한 사람으로 돌려주었습니다. 역할을 못하는 안식일 대신에 예수의 하나님나라가 새로운 안식을 줍니다.


근본주의신학과 문자주의 성경해석, 거기서 나오는 반시대적인 작태들이 지금 교회를 기울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세습하고, 가부장질서를 고수하고, 남녀차별을 당연시하고, 반공을 신앙이념으로 삼고, 분단에 이른 역사과정은 전혀 알려하지 않고, 미국만 떠받들고, 북한을 적대시하고, 북한정권을 무너뜨리는 통일만 떠들고, 민주주의를 대폭 망가뜨린 이명박, 박근혜정부를 맹목적으로 지지하고, 창조과학으로 자신의 무식을 위장하고, 우리 사회 소수자의 인권과 권리를 지켜주자는 차별금지법을 극단적으로 반대하고, 동성애자를 배척하는 것을 신앙의 표준으로 삼고, 공익정책은 집단이기주의로 앞장서서 반대하고... 민중을 긍휼히 여기신 예수와는 전혀 닮은 구석이 없는 교회로 전락했습니다. 교회도 귀신들렸습니다. 우리는 예수와 관계없는 수구교회들 대신에 예수정신을 되살리고, 평화생명정의평등을 선포하고 그 길로 가는 교회여야 합니다.

세 번째 주목할 것은 ‘다음날’입니다.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외딴 곳 광야로 나가서 기도합니다. 이 말씀도 단순한 상황설명을 넘어서 이중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날은 지금의 주일입니다. 복음저자가 안식일 대안으로 지금의 주일을 강조하려는 의도까지 있는지는 모르지만, 예수가 아주 이른 새벽에 기도하심으로 하루를 시작하셨다는 말씀은 사람을 억누르고 꼼짝 못하게 하는 안식일이 지나고,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생명평화세상을 열었다는 암시입니다.

그런데 이 복되고 서광이 충만한 날에도 유혹이 들어옵니다.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베드로가 말합니다.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요? 스승님 인기가 하늘을 찌릅니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스승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베드로는 이곳에 계속 머무르면서 사람들 존중과 인정을 받으면서 일하자는 속셈입니다. 초반부터 예수와 제자 사이에 운동노선에 대한 긴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마을에 안주하지 않습니다. 인근 다른 마을로 이동해서 민중을 살리는 말씀선포와 귀신쫓음을 계속합니다.


향심기도에 환영기도가 있습니다. 본능적 욕구에 기초한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에서 활동하는 거짓자기에서 벗어나는 기도입니다. 짧은 기도문이니 외우십시오.

나는 안전과 생존에 대한 욕구를 가게 놓아둡니다.

나는 존중과 애정에 대한 욕구를 가게 놓아둡니다.

나는 힘과 통제에 대한 욕구를 가게 놓아둡니다.

나는 상황을 변화시키는 욕구를 가게 놓아둡니다.

예수시대 이스라엘은 귀신들린 사회였습니다. 로마와 그에 빌붙은 지배세력은 끝도 없이 민중을 압살하였습니다. 억눌린 상황은 수많은 민중을 귀신들게 했습니다. 그 속에서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냄으로 민중을 구했습니다. 귀신들림의 원인을 치유했습니다. 민중을 자유케 하고 지배착취없는 평등세상을 열어갔습니다.

오늘 우리는 귀신들린 사회를 치유하기 위해 어떤 증언을 해야 하나요? 권력 때문에 민중이 희생당하는 일이 없도록 권력도 하나님 아래 있음을 증언해야 합니다. 또한 평등세상이 되도록 노동자민중과 한편인 하나님나라를 증언해야 합니다. 또 민족의 분단현실을 애통하고 반공이념에 빠지지 말고 남북이 하나되는 길을 가도록 화해와 용납의 증언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해서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하나님나라 도래가 이 땅 위에 구현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도 이 분명한 목표를 향해 가고, 나라도 민족도 이 길을 가도록 진실과 정성을 다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