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에서/어떤 분의 깨달음을 고마워하며

“요한이라 하여라” (눅 1:13-17) / 진밭교평화기도회 백창욱목사 설교

도덕쌤 2020. 1. 20. 12:52

오늘 복음말씀은 요한의 탄생이야기다. 예수의 탄생이야기처럼 요한의 탄생이야기도 창작물이다. 본문은 예언형식으로 돼 있지만, 실제로는 일을 겪은 후 소급해서 예언형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사후예언이라고 한다. 복음서에서는 아주 흔한 서술기법이다.

사후예언임을 알려주는 증거는 많다. 요한의 활동에 대한 예언을 보자면, 매우 구체적이다. 예를 들어서 “그는 포도주와 독한 술을 입에 대지 않을 것이요”(15절),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주님보다 앞서 와서”(17절) 같은 내용은 실제 요한의 삶이다. 그는 광야에서 나실인처럼 살았다. 요한의 옷차림은 엘리야와 흡사했다. 요한 스스로 자신은 뒤에 오실 분의 안내자라고 했다. 이처럼 실제 일어난 일을 예언형식으로 말하니 정확할 수밖에 없다. 

요한도 예수처럼 기득권 주류들 입장에서는 듣보잡이다. 민중 중 민중이다. 조선시대 한 상놈의 출생 기원에 대해 누구도 관심 없듯이, 요한도 사실 그렇다. 그렇다면 요한의 부모를 소개하는 서술은 무엇인가? 실제 요한의 족보가 그런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을 누가 알겠는가? 다만 해석하자면, 이것은 누가저자가 이야기를 펼쳐나가는데 필요한 소재이다. 

어떤 소재일까? 요한의 어머니는 사제 아론의 후예라고 소개한다. 나는 아론의 후예에 주목한다. 알다시피 아론은 대제사장으로 살았다.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백성 간 중재자 역할을 했다. 또 평생 모세의 보좌 일을 했다. 아론의 성격은 요한과 매우 흡사하다. 요한은 물세례운동으로 죄인인 백성을 신원해 주었고, 예수의 길을 미리 닦는 역할을 했다. 저자는 요한의 모친이 아론의 후예라는 서술을 통해 요한의 일생도 그런 노선임을 암시했다고 본다. 

왜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인가?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면서 예수의 일생에 거룩한 가공을 입히는 것처럼, 그래서 마태나 누가가 예수의 탄생설화를 창작한 것처럼, 요한에게도 비슷한 가공을 입히는 것이다. 거룩한 가공에는 탄생비화만한 소재가 없다. 그리고 극적이면 극적일수록 더 좋다. 그래서 오늘 복음처럼 요한의 탄생비화가 등장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세상에 등장한 배경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이 작용하였다는 뜻이니, 요한의 등장, 존재, 활동에 공식성을 부여하기에는 최적이다. 

오늘 복음에서 핵심쟁점은 태어날 아기의 이름이다. 천사가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버지 스가랴는 이 상황이 너무나 급작스럽다. 아내의 나이가 많아서 아이를 낳을 조건이 못 되는지라 주저한다. 그 까닭으로 스가랴는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을 때까지 말을 못 하는 장애를 입는다. 급기야 아들이 태어나서 이름을 지을 때 서판에 요한이라고 쓰자, 그 때서야 입이 열리고 혀가 풀린다. 비범한 사람의 탄생에 어울릴법한 극적인 요소가 요한에게도 등장한다. 

요한의 등장은 무엇을 말하나? 아무리 어두운 시대에도 세상을 밝히는 빛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빛은 항상 민중에게서 나온다. 지배세력은 지들 욕망을 채우기에만 바쁠 뿐, 민중의 생존과 안위에는 일절 관심 없다. 참으로 썩을 놈들이다. 그런데 그 빛은 저절로 어둠을 비추지 않는다. 요한이 경수가 끊어진 모친에게서 태어났듯이, 인간의 한계를 규정하는 조건과 상황을 극복해야만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민중은 빛을 얻는다. 새 세상을 맞이할 수 있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다시 시계제로가 됐다. 어두운 구름이 가득하다. 북미관계는 다시 일촉즉발이다. 북이 미국에게 제시한 ‘새로운 계산법’의 시한인 연말이 다 가고 있지만, 미 정권은 태도전환이 보이지 않는다. 되레 긴장을 높이는 말들만 오고가고 있다. 일이 되는 과정에서 겪는 극적인 통과의례라면 다행이지만, 지금으로서는 한 치 앞이 어둡다. 

한국의 처지도 말이 아니다. 미제는 이제 아예 노골적으로 협박 짓을 일삼는다. 한국 등에 빨대를 꽂아놓고 대놓고 빨아먹기로 작정했다. 주둔비 50억 달러 강요가 그 대표 사례이다. 동맹이라고 하고서는 강도짓을 일삼는다. 소성리 사드불법기지 도발도 변함없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프로펠러 두 개 달린 헬기가 굉음을 울리며 불법기지를 드나든다. 그때마다 지축을 울리는 소음에 소성리 사람들은 우울하고 분노한다. ‘저 놈의 미군새끼들’ 하며 고함치고 지팡이를 흔든다. 정권은 물론이고 한국 대중은 이제 심각하게 결단할 때가 됐다. 이 놈의 미군새끼들 등쌀을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지에 대해 양단간에 결정해야 한다. 이 나라가 무한정 미제놈들 호구로 식민지 살이를 할 수는 없다. 분단 74년이다. 더 늦기 전에 남북이 6.15 선언에서 말한 대로,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의 공통점을 찾아 통일을 실현해야 한다. 요한 이름이 이스라엘 민중의 희망의 전조이듯이, 우리도 결단하고 새로운 해법을 내야 한다. 낡은 이데올로기를 버리고 상생 공존 평화의 이데올로기로 전환해야 한다. 우리가 먼저 새로운 길을 힘차게 열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