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백/어쩌다 쓰는 일기

조현철 청년동지를 보내던 1주일의 기록

도덕쌤 2018. 11. 19. 01:27

현철이에게 종합감기약을 사다 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것이 11월 7일 수요일 저녁 김천촛불에 나가 있을 때였습니다. 전날까지 비빔면 네 그릇을 먹고 포만감에 즐거워하던 녀석이 웬 감기냐며 속으로 꿍시렁대며 타이레놀과 판피린티를 사다 주었습니다. 먹지도 못하고 잠에 취해 있다가 목요일 아침에야 약을 먹었답니다. 원불교 컨테이너에서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 바닥이 뜨겁다고 덮을 것은 다 차버리고 옷도 반바지와 런닝 정도만 입고 있어서 감기가 지나칠 수 있겠냐 싶었습니다. 하지만 깨워도 대답만 할 뿐 곯아떨어져 있어서 늘 그런 모습에 익숙해 있던 나는 아침이 되어서야 약을 먹었는지 확인했지요.

현철이는 목요일 내내 밥도 먹지 않고 쉬고 있다가 겨우 저녁을 먹었습니다. 상태를 물으니 조금 좋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힘들다고 했습니다. 체온관리 잘하라고 잘 덮고 자라고 한마디하고 들어갔습니다.

9일 금요일 아침 일과를 마치고 내려오니 웬일로 깨어 기다리고 있던 현철이가 병원에 가야겠다고 했습니다. 영재팀장이 성주 효병원으로 데려갔다 왔지요. 역류성식도염에 감기몸살이 겹쳤다고 했습니다. 약을 처방받고 돌아와 10일 토요일 저녁까지 쉬면서 식도염에 자극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식사를 했습니다. 토요문화제가 진행되는 동안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몸에 열이 많아 보인다고 걱정하는 분들에게 효병원에 다녀온 얘기를 하고 들어갔습니다.

11일 일요일 새벽 정문앞에 이르렀는데 보이스톡으로 연락해 왔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통화를 하니 응급실로 가야겠답니다. 영재팀장 깨워서 부탁하라 하고 내려오는데 내가 내려갈 때까지 참고 있겠다 싶었습니다. 힘든 부탁은 그저 내게만 하느냐고 또 속으로 꿍시렁거리다가 영재팀장에게 전화를 걸어 챙겨달라 전했습니다. 아침예배를 마치고 내려가니 영재팀장이 김천제일병원 응급실로 데려갔는데 폐렴이라 한다며 다만 혈압이 너무 높아 걱정이라고 했습니다. 진석씨에게는 현철이가 그 새벽에 카톡으로 메시지를 남겨두었던 모양이었습니다. 깨우지 못하고 카톡메시지만 남겨둔 미련스러움이 안타까웠습니다. 진석씨는 정목사와 상수와 함께 문병을 다녀왔지요. 난 11일 하나의 날을 맞아 곳곳에서 열리고 있는 각종 행사, 예배 등에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며 인터넷에 빠져 쉬고 있었습니다.

12일 월요일 새벽 호흡곤란으로 중환자실로 옮긴다는 연락을 받고 영재팀장은 아침일정에도 참여하지 못하고 하루종일 병원에 나가 있었습니다. 호흡곤란이 온 이유는 허파 크기는 보통 사람인데 체중은 보통사람 두배도 넘으니 몸에 필요한 산소를 제대로 공급해주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일반병실에서도 코에 산소호스를 끼고 있었는데 그것도 부족하여 중환자실로 옮겨 인공호흡기를 달았다더군요. 

중환자실이라 면회가 제한되니 밖에서 여기저기 연락하고 의사와 상담하며 마음만 졸이며 하루종일 있었을 영재팀장이 걱정이었습니다. 저녁이 되어서야 매우 호전된 모습으로 곧 중환자실을 나올 듯한데 부모님과 상의하여 서울신촌세브란스로 데려가기로 하였다는 얘기를 듣고 안심하였습니다. 영재팀장도 상황실로 돌아왔습니다. 나도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13일 화요일 새벽 두시쯤 잠에서 깨었습니다. 묵상에 들어가고 있는데 영재팀장이 밖에서 불러 현철이가 위독해서 병원으로 달려가야겠다며 먼저 가니 뒤쫓아오라고 했습니다. 자세한 사정도 모른 채 어리둥절하다 진석씨를 깨우고 나도 먼저 병원에 갈테니 뒤쫓아오라고 하고는 병실로 향했습니다. 중환자실에선 스텝들이 심장을 다시 뛰게하느라 바빴습니다. 발을 붙들고 기도하며 지켜보았습니다. 아직 자가호흡은 돌아오지 않고 있지만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습니다. 3시 반쯤 진밭교아침기도회를 위해 소성리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다시 안정을 찾아 부모님 내여오시면 서울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입석리를 지나 연명리로 들어설 즈음에 영재팀장이 다시 돌아오는 게 좋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이제 보내주어야 할 것같다는 얘기였습니다. 다시 병원에 오니 부모님과 연락하여 심폐소생술을 중단하고 인공호흡기만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심장은 멈추었는데 기계의 힘으로 가슴만 숨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부모님 도착을 기다리며 허망한 마음으로 앉아 이제 어떻게 보내야 할지 걱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영정사진으로 쓸 사진들을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사진방에 올라온 사진들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고르다보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부모님이 도착하고 현철이를 붙들고 통곡하는 현철이 어머니를 붙들고 함께 눈물 흘리며 현철이의 무거운 몸을 영안실로 옮겼습니다.

옷을 갈아입으러 소성리를 다녀오는 동안 장례는 평화회의장으로 하고 유골을 소성리에서 산골을 하기로 가족들과 상황실이 뜻을 모았습니다. 나에게는 지킴이를 대표해서 호상의 역할이 주어졌습니다. 부모님을 만나 현철이를 보내는 부모의 마음을 위로해 드렸습니다. 백혈병으로 너무 일찍 첫아들을 보냈던 아픔을 얘기해 드렸습니다. 현철이는 첫아들과 한 달 차이의 동갑내기였습니다. 장기기증 홍보 드라마 "아들아 너는 아느냐", 세월호유가족 이야기 등등, 짧은 시간 내 삶을 고백하며, 현철이 영정사진의 웃는 모습이 그렇게 웃음지을 수 있는 삶을 산 것같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