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백/소성리 사드저지기독교현장기도소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구원, 그리고 혼합주의 신앙(막 10:17-27)/소성리 아침 묵상(180528)

도덕쌤 2018. 5. 28. 16:10


5월 28일 소성리 아침 묵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구원, 그리고 혼합주의 신앙(막 10:17-27)


◎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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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려는 작은 예수들을 향하여 '혼합주의'라고 비난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려는 작은 예수들을 향하여 좌익이니 종북이니 매도하면서, 작은 예수들의 특징 중 하나인 종교간 연대활동에 대해서도 '다원주의'니 '혼합주의'니 맹렬히 비난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엄격하게 양자택일하라고 요구한 야훼신앙과 물신숭배 사이에서 둘을 교묘히 통합하여 둘 다 섬기고 있는 것은 바로 그 교회들이지요. 

오늘날 대형교회들은 물질적인 풍요를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네게 복을 주리라" 말씀하시며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한 복들 가운데 물질적인 풍요도 포함되어 있기에 이런 설교가 전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기복종교에 머무르게 묶어두면서 물질적인 부를 통해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평가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 예수님 말씀을 매우 불편한 마음으로 듣습니다. 그들이 강단에서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전하는 시간은 오직 헌금을 강요하는 설교시간 뿐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는 말씀과 함께 전하지요.


오늘 말씀은 부자청년의 질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 묻는 청년에게 예수님은 십계명의 가르침 중에 사회적인 영역의 가르침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청년은 어려서부터 그 계명들을 실천해 왔다고 대답하지요.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던 것이지요. 그것만으로는 영생을 얻기에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청년을 사.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밝혀주십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리고 나를 따라라." 

예수님께서 따르라는 예수님의 길은 어떤 길입니까? 부활 후 승천하시기 직전에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나를 따라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를 따라 지금 승천하자는 말씀이 아니었던 것은 다 아시잖습니까?


오늘의 말씀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는 얘기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위로의 말씀이 아닙니다. 물질적 욕구에 사로잡혀 물신숭배에 빠져 있는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경고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도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도 오늘날의 기복신앙과 같은 정신을 가지고 따르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스스로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를 자처했던 요한과 그 형제 야고보가 세번째 수난예고를 듣고도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라고 제자들이 한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누가' 앞에 '도대체'를 덧붙이면 더욱 실감나게 들릴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구원받을 만한 이들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예수님은 제자들의 한탄을 눈여겨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나,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저는 이 말씀도 주의깊게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물신숭배에 빠져 있는데, 혹은 맘몬과 야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당신의 백성이라고 선택하여 하늘나라에 데려가시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물신숭배에 깊이 빠져 있는 인간들, 그 탐욕의 세계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손을 뻗어 빠져나오게 하신다는 얘기입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 먼저 그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너희들도 할 수 있다. 따라오라." 앞장서서 걸음마를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그 걸음마를 따라 물신숭배의 노예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걸어보는 것입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아기였던 우리, 순자의 성악설의 모티브가 되었던 죽은 어미 가슴에서 젖을 빨며 우는 아기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그랬던 우리가 어떻게 지금 인류의 평화를 꿈꾸며 헌신하는 인간이 되었습니까? 여러분이 성장과정에서 받았던 무수한 사랑이 여러분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시키지 않았습니까?

무기로는 평화를 이룰 수 없다는 우리들의 명제를 다시 이 대목에서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욕설로 저들을 변화시킬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만이 우리를 물신숭배 그 탐욕의 세계에서 건져올려주실 수 있습니다. 맘몬의 지배속에서는 지옥을 벗어나질 못합니다.


전쟁무기 사드를 가져다놓은 저들은 그 이유를 어떻게 꾸며대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탐욕을 채우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들은 맘몬을 숭배하면서 그 이름을 단지 야훼라고 속이는 것뿐입니다. 야훼신앙과 물신숭배 둘을 교묘히 통합하여 결국 악마를 섬기도록 하는 혼합주의 종교에 속지 맙시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이 보여주셨던 십자가를 지는 방법으로 저 악마들과의 싸움에 나섭니다. 저들의 길을 막아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