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에서/어떤 분의 깨달음을 고마워하며

“손에 키를 들었다”(대림절 세 번째 주일181216, 백창욱목사님 설교)(키워드:부활,김용균)

도덕쌤 2018. 12. 17. 10:05

주일설교문(18. 12. 16) 대림절 세 번째 주일

누가 3:7-18 “손에 키를 들었다”

지난 주일 광주에 간 김에 다음날 망월동 국립묘지에 갔습니다. 5.18 현장예배 때 가지만 늘 일정에 쫓기다 오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묘소 하나하나를 찬찬히 보았습니다. 먼저 구묘역에 갔습니다. 아시다시피 신묘역은 5.18 항쟁과 직접 관련된 분들이 묻혀 있고, 구묘역에는 이 땅 민주화 투쟁에서 자기 몸을 바친 열사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주로 1990년대, 노태우정권 때 분신한 열사들입니다. 노태우정권이 수세에 몰린 정국을 반전시키려고 공안정국을 조장해서 운동을 압살하려는 시기에, 분신으로 저항하여, 민주화 투쟁에 불씨를 당겼습니다. 대개 나이가 20대 초반입니다. 젊디젊은 이들이 자신의 몸을 불살랐습니다. 그들이 살아온 길을 읽어보면 반복해서 나오는 공통 단어가 있습니다. 조국통일과 이 땅의 민주화, 노동해방입니다. 그들에게도 사랑하는 부모가 있고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습니다. 개인의 꿈과 미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상의 행복을 다 접어두고 더 큰 가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습니다.


그 묘소들을 하나하나 보다가 문득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 부활은 무덤에서 시작하는구나’ 하는 통찰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무덤에서 시작합니다. 복음서 부활증언도 모두 무덤에서 시작했습ㄴ다.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있습니다. 어떤 죽음입니까? 망월동이 어떤 무덤인가요? 전두환 살인마에게 학살당한 민중이 묻힌 곳입니다. 처음에는 묻는 일조차 두려웠습니다. 부모는 형제는 친구들은 밤중에 피눈물을 삼키며 몰래 그들을 묻어야 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피눈물을 삼키며 자식을 묻을 때 어떤 상상을 했을까요. 반드시 새 세상이 와서 내 아들의 죽음이 신원되기를 바랐습니다. 내가 아들의 뒤를 이어, 친구의 뒤를 이어 이 억울한 죽음을 반드시 되살리겠다는 결의를 다졌습니다. 바로 그렇게 부활이 시작합니다. 로마제국의 폭력으로 십자가형을 당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망월동에서 한 치도 다름없이 재현되었습니다. 그 길을 분신열사들도 똑같이 따라 갔습니다. 이들을 부활시키는 일은 무엇인가요? 이들이 불길에 쓰러져가면서 유서를 통해 밝힌 대로 조국의 통일과 이 땅의 민주화, 노동해방을 이루는 길입니다. 사람이 생물적으로 살아나는 게 부활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예수의 부활이 모든 사람이 제 숨 편히 쉬는 하나님나라 완성이듯이, 망월동에 묻힌 분들의 부활은 한반도가 분단을 극복하고 미국의 예속에서 벗어나서 자주국가를 이루며 노동자가 제 숨 편히 쉬는 세상을 이루는 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요? 25세 비정규노동자 김용균씨의 죽음은 우리를 비통에 빠뜨렸습니다. 석탄가루 분진 때문에 앞이 잘 안 보이는 현장에서 밤에 홀로 일하다가 무서운 속도로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에 빨려 들어서 몸이 절단난 아들의 죽음을 대면한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요? “어제, 아이 일하던 곳을 갔습니다. 갔는데, 너무 많은 작업량과 너무 열악한 환경이, 말문이 막혔습니다. 내가 이런 곳에 우리 아들을 맡기다니. 아무리 일자리 없어도, 놀고먹는 한이 있어도, 이런 데 안 보낼 거라 생각했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살인병기에 내몰겠습니까. 현장에서 아들 모습이 어땠냐고 물으니. 머리는 이 쪽에, 몸체는 저 쪽에, 등은 갈라져서 타버리고, 타버린 채 벨트에 끼어있다고 합니다. 어느 부모가 이런 꼴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우리 아이가 그 일을 했다 생각하니, 당했다 생각하니,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 있을 수 있는지. 옛날에 우리 지하탄광보다 열악한 게 지금 시대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아들이 억울하게 당해야 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걸 알리고 싶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를 바꾸고 싶습니다. 아니, 우리나라를 저주합니다. 내 아들이 죽었는데, 저에게는 아무것도 소용없습니다. 명예회복, 그거 하나 찾고자 합니다. 아들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다면요. 도와주십시오.”


김용균씨의 죽음과 그 어머니의 절규는 노동현실이 더 이상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는 무거운 경종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 사회 주류는 이 비인간화된 노동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몇일 북적대다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자본은 이익독점에 대해 가책을 느끼고 노동환경개선에 분배할까.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강력한 징후를 알아차릴까. 고칠 수 있을까. 우리는 다시 기회를 만들 수 있을까. 모든 게 미지수고 불확실하고 부정적입니다.


 

고종의 시종인 정환덕이 쓴 『남가몽-조선 최후의 48년』을 보면, 권력자의 시국인식이 나옵니다. “황제폐하께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짐이 보위에 오른 지 40여 년이 되었지만 본시 박덕한 사람이라서 왕위에 올랐으나 한 번도 편안한 해가 없었다. 1866년 병인양요를 겪은 뒤 10년 만에 병자왜란(1876년 강화조약)이 있었고, 그 뒤 6년 만인 1882년에는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니 이는 역대 성조에 없었던 일이다. 그 후 2년 만에 일본 유학생들이 갑신정변(1884년)을 일으켜 몰래 창덕궁에 들어와 충신과 양민을 살해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그 뿐인가. 1892년 임진년과 이듬해 계사년에는 동학당 무리들이 얼마나 시끄럽게 굴었는지 거의 조선 전국이 공포에 싸여 바람소리 학 울음소리에도 놀라 자빠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 뒤 갑오년(1894년)에는 갑신년에 망명했던 개화당이 외국인을 데리고 와서 귀국한 뒤 무수한 변란을 일으켰다. 이어 을미년(1895년)에는 왜적이 중궁(민비)을 시해했다. 또 병신년(1896년)에는 의병이 일어나 민심을 요동시켰으니 무슨 이런 세월이 있었겠는가. 그 뒤 무술년(1898년)에 독립협회가 난리를 일으키고 갑진년(1904년)에 러일전쟁, 1905년 을사오조약이 성립되었으니 어찌 참을 수 있는 일인가?”


이 글을 보면, 고종의 상황인식이 참 안이합니다. 특히 동학당과 의병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게 그렇습니다. 동학혁명의 원인이 탐관오리의 토색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일어난 저항인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든지, 조정이 망친 나라를 대신 지키겠다고 나선 의병활동을 민심요동이라고 깍아내리는 상황인식은 한마디로 바보같습니다. 오직 왕 자신의 보위에만 관심을 쏟습니다. 지금 권력자들은 어떨까요. 진심으로 노동자민중을 위하는가. 그들의 노동현실을 획기적으로 전환하려는 개혁의지가 있는가. 아니면 노동자민중의 신음과 외침과 저항을 귀찮게만 보는 건 아닌지, 그래서 뭉개든지, 때려잡으려고만 할까봐 걱정입니다. 권력이 대오각성 돌이키지 않으면, 그 끝이 어찌될지는 말하기도 겁납니다. 역사는 반복한다는 말은 발전도 퇴보도 똑같이 유효합니다.


 

우리는 주님 다시 오시는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가슴 벅차게 설레는 일인가요? 아니면 공포의 떨림인가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뜻밖에도 다시 오실 주님은 선물보따리를 가득 안고 오시는 산타크로스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무시무시합니다. 선물보따리가 아니라 도끼를 들고 옵니다.


“도끼를 이미 나무뿌리에 갖다 놓으셨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신다.”(9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를 다 불속에 던지듯,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지 않는 사람을 도끼로 찍어버립니다. 요한의 말에 두려움을 느낀 사람들이 살 길을 구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복음에는 무리, 세리, 군인들이 등장합니다. 2천년이 훌쩍 지난 지금 무리, 세리, 군인이야기를 똑같이 말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들은 1세기 팔레스타인의 사례입니다. 지금은 지금식대로 말해야 복음을 바로 적용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쳤습니다. 속옷 두 벌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요? 집을 두 채 이상 가진 중산층입니다. 세리는 공무원입니다. 군인은 자본가와 정치권력자입니다. 왜 그렇게 말하나요? 요한이 군인에게 꾸짖는 말을 보면, 빼앗지 말라는 말을 세 번 합니다.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14절) 지금 노동자와 민중의 몫을 빼앗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자본가와 정치권력자입니다. 어떻게 빼앗습니까? 제도로 법으로 정책으로 빼앗습니다. 이런 토색행위는 깡패가 주먹으로 빼앗는 것보다 훨씬 교묘하고 구조적입니다.


 

요한이 이 시대에서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집을 두 채 이상 가진 사람은 더 이상 부동산투기를 하지 말라. 집 한 채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집 없는 사람들 등골을 휘게 하지 말라. 공무원은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조선이 망한 이유는 전국 수령의 2/3가 돈으로 벼슬을 산 까닭입니다. 수령들은 그 돈 뽑으려고 백성을 더욱 발가벗겼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분쟁을 일으키는 소위 국책사업은 그 분야 마피아들의 욕망실현 사업입니다. 안보마피아, 건설마피아, 복지마피아, 교육마피아들이 그동안 짜 놓은 질서아래 대대로 이익을 독점하는 구조입니다. 그들의 욕망에 대상이 된 시골사람들만 날벼락을 당합니다.


요한의 말이 강력하자 사람들은 그가 그리스도이신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리스도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성령과 불세례는 무엇인가요? 17절이 길잡이입니다. “그는 자기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 성령과 불은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심판의 상징입니다. 거룩한 영은 알곡을 분별하고 불은 쭉정이를 불사릅니다. 그런데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이오”라고 행위에 존칭을 썼습니다. 즉 키를 잡은 사람이 농부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심판을 위해 성령과 불로 강림합니다.


대림은 곧바로 종말로 이어집니다. 주님이 다시 오심은 세상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말의 연장선을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알곡이 될까요. 쭉정이 신세를 면할까요. 오늘 서신서인 빌립보서는 종말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해 말씀합니다. 4-7절에 네 가지 덕목을 말합니다. 기뻐하라.(4절) 관용하라.(5절) 기도하라. 감사하라.(6,7절) 이 말씀을 대면하면서 한참 고민했습니다. 아들을 잃은 부모가 이 말씀을 어떻게 소화할 수 있을까? 오늘날같이 비인간화된 경제체제 속에서, 노동자민중의 희생이 속출하는 현실에서 과연 기뻐하고 관용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게 가능한가? 또 다른 모순이 아닌가. 바울은 실정을 알기나 하고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인가. 그러다 답을 찾았습니다. 고난을 공적으로 승화시키라는 뜻입니다. 김용균씨 어머니가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아이 두 동강 난 걸 사진도 보고, 이야기도 듣고, 이건 한국에서 벌어질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일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빨리 나오라 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이 대체한다 해도 같은 상황일겁니다. 아들이 일하던 곳, 정부가 운영했잖아요. 정부가 이런 곳을 운영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일하는 아이들에게 빨리 나가라고, 더 죽는 거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아들 하나면 됐지, 아들같은 아이들이 죽는 걸 더 보고 싶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말씀에는 중요한 대안이 있습니다. 노동자들에게 사람을 죽게 하는 노동을 거부할 권리가 있음을 깨우치고, 정부는 노동자가 안전하게 행복하게 일할 작업환경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깨우칩니다. 개인이 고통에 함몰되면 그냥 불행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하든지 공으로 승화시키면, 기독언어로 말하자면 하나님나라 운동으로 전환시키면, 그 속에서 실날같이 가느다랗지만, 살 길이 열립니다. 바울의 말씀은 고난 대처법입니다. 그냥 신간 편한 사람이 신간 편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고난겪기로 말하자면 바울만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빌립보서도 옥중서신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명령형으로 말합니다. 기뻐하고, 관용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고. 그 정신으로 고통을 견디고 하나님나라를 이루라고 권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