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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양떼를 먹여라”(2019. 5. 5 백창욱님 설교)

도덕쌤 2019. 5. 5. 17:47

주일설교문(19. 5. 5) 부활절 세 번째 주일

요한 21:1-17 “내 양떼를 먹여라”


지난 주 교회 사랑방에 소개한 책, 『믿음을 넘어서』-도마의 비밀복음서. 소감문 읽어보았는지요? 그 책에서 매우 흥미로운 대목을 봤습니다. ‘어긋나는 진술, 요한복음과 도마복음’이라는 항목이다. 도마복음은 나그함마디 문서 중 하나입니다. 1945년 이집트 남부지방에 사는 한 농부가 땅을 파내려가다가 1미터에 달하는 붉은 토기 단지를 발견합니다. 단지 안에는 가죽으로 장정한 양피지 책 13권이 들어 있었습니다. 황금이 아닌 것에 실망한 농부는 집으로 돌아와서 책 13권과 양피지 책장들을 화덕 옆 밀짚더미 위에 내팽개쳤고, 농부의 어머니는 밀짚과 함께 양피지책장 대부분을 불쏘시개로 써버렸습니다. 다행히 남아 있는 문서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움을 안겨준 이 책들이 그 유명한 나그함마디 문서입니다. 이 때 도마복음 뿐만 아니라 주옥같은 문서들이 무더기로 나왔습니다. <빌립복음서> <진리복음서> <이집트 복음서> <야고보외경> <베드로 묵시록> 등입니다. 모두 고대원본을 곱트어로 옮긴 고대 기독교 문서입니다. 이 문서는 어떻게 땅속에 묻히게 되었을까요?


367년 아리우스와의 대결에서 최종 승리한 아타나시우스는 부활절 서신을 통해 이단 문서를 모두 파기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이집트에 있는 성 파코미우스 수도사들이 소각을 명한 책들을 거두어서 커다란 단지에 봉한 후 나그함마디 산 중턱에 묻었습니다. 이 문서들이 땅 속에 무사히 있다가 1,600년이 지난 후, 아까 말한 무함마드 알리라는 이집트 농민이 우연히 발견한 것입니다. 이 문서들을 통하여 초기 기독교역사가 어느 정도 밝혀졌습니다. 일세기에도 정통기독교와 여러 갈래의 영지주의기독교가 있었고, 이 기독교도들이 그노시스파 (영지주의)로 불렸습니다. 『믿음을 넘어서』 책의 목적은 영지주의 문서들이 이단으로 되기까지의 과정과 이 일이 기독교 역사에서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저자의 문제의식은 이렇습니다. “교회는 어째서 이들 문헌이 이단이고 신약성경의 사복음만이 정통이라고 못 박았는가? 누가 어떤 상황에서 이같은 결정을 내렸는가? 이에 대한 답을 찾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초기 기독교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을 접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모습은 순수하고 단순하지 않고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다양하고 복잡한 세계였습니다.

 

요한복음과 도마복음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쓰여 졌습니다. 일세기 말엽에 쓰여진 요한복음은 예수의 정체를 둘러싼 격한 논쟁에서 나왔습니다. 예수에 관한 특정입장을 옹호하고 다른 입장을 반박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입장은 바로 도마복음입니다. 요한복음은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고자”(요 20:31) 복음을 기록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도마복음은 하나님의 빛이 예수뿐 아니라 모든 사람 안에서 발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도마복음은 요한복음처럼 예수를 믿으라고 요구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이 허락한 자기 자신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을 알라고 권합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도마복음의 도마 곧 쌍둥이라는 이름이 그의 주장을 상징합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예수를 만날 때 예수와 일란성 쌍둥이가 된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과 도마복음의 가르침 중에는 유사한 부분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의 고별설교(13-17장)는 도마복음에서는 살아계신 예수의 비밀의 말씀으로 나옵니다. 또 요한과 도마는 예수를 태초에 생긴 거룩한 빛이고, 이 태초의 빛을 통해 예수가 우주만물로 이어진다고 강조합니다. “만물이 그(로고스, 빛)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요 1:3)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과 도마복음이 예수의 비밀의 가르침을 해석하는 방향은 전혀 다릅니다.


요한은 예수는 태초에 생긴 빛으로 하나님의 독생자이다. 사람들의 빛이고 예수만이 세상에 거룩한 참 빛을 가져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가 구현하는 참 빛을 통해서만 신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도마복음은 예수가 구현하는 참 빛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할 뿐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사람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도마의 주장은 천 년 후에 유대교와 기독교 신비주의의 중심주제가 됩니다. 오늘날 영성에서 중요한 가르침인 관상기도가 지향하는 바는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인데 이것도 요한보다는 도마의 가르침에 부합합니다.


안타깝게도 두 복음은 신의 존재를 서로 보완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대립적으로 갔습니다. 그 뒤 결과는 요한의 의견이 우세했고 오늘날까지 기독교의 중심사상이 됩니다. 요한이 제시하는 예수의 이미지가 주도권을 잡고 기독교 가르침의 정의가 됩니다. 사복음을 옹호하는 기독교도들은 도마복음같은 가르침을 공격하고 이단으로 배격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요한이 도마를 배격하는 사례가 뚜렷하게 있습니다. 바로 ‘의심하는 도마’라는 인물을 만든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도마가 상황파악 못하고 예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부정적 인물로 세 차례 나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 주 본문인 부활예수가 주간의 첫 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이야기입니다.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 자리에서 제자들을 사도로 삼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 성령을 부여하고 죄를 사하거나 그대로 둘 권한을 위임합니다. 그러나 도마는 이 자리에 빠졌으므로 예수가 제자들에게 명한 사명을 받지 못한 결격자가 된 것입니다.


도마의 예수는 제자들 각자에게 내면의 빛을 발견하라고 하는 데 비해 요한의 예수는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는다.”(8:12)고 합니다. 도마의 예수는 “우리는 빛에서 왔노라”라고 말하는 반면에 요한의 예수는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왔으며”(8:23) 우리는 예수의 쌍둥이 형제가 아니며 잠재적으로도 그와 동등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따르고 믿고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으로서 경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요한과 도마의 대립은 그 뒤 기독교역사에서 계속되었습니다. 2세기에는 정통교리를 고수하는 이레네우스와 정통교리 너머를 주장하는 발렌티누스 교파가 충돌했고, 4세기에는 그 유명한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대결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주관아래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통교리가 최종 승리하고 도마복음은 이단으로 확정됩니다. 매우 다행인 점은, 오늘날 우리는 도마복음 덕분에 다른 기독교 전통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영지주의, 또는 이단이라 배척해 온 것 중에는 그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을 뿐인 다른 가르침도 있다는 것입니다. 도마복음은 114절의 짧은 분량입니다. 카톡에 올릴테니 읽어보십시오.


앞에서 확인하듯이, 또 제가 여러 차례 말씀했듯이, 복음서는 그냥 예수의 행적을 보도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저자마다 뚜렷한 자기 목적이 있습니다. 물론 복음서의 증언을 통해 예수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압니다. 그런 면에서 복음서는 예수의 삶을 증언하는 유일한 문서입니다. 하지만 복음서의 숨은 가치가 또 있습니다. 바로 예수의 삶에 공동체의 사정을 대입하는 것입니다. 오늘 부활본문도 그렇습니다. 우선 사복음서에서 부활 예수와 제자들 만남 장소를 보겠습니다. 마태복음은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를 만납니다. 마가복음은 부활예수가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볼 것이라는 예고만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만남과 승천이 다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집니다. 요한복음은 오늘 복음말씀에서 보듯이, 디베랴바다 곧 갈릴리바다에서 예수와 제자들이 만납니다. 부활예수와 제자들이 만난 진짜 장소는 어디인가요? 예루살렘인가요? 갈릴리인가요? 둘 다 인가요? 제자들이 예루살렘과 갈릴리를 왔다 갔다 하는 건가요? 알 수 없습니다. 이것만 봐도 복음서 저자가 단순히 예수행적을 사실 보도하는 게 다가 아님을 봅니다. 사실보도가 목적이라면 복음서 사이에 충돌이 없어야 합니다. 부활예수 만남 장소가 복음서마다 다른 이유는 예수를 증언하는 속에 자기들 사정을 대입했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속한 공동체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부활예수 만남의 장소가 예루살렘도 되고 갈릴리도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디베랴 바다에서 부활예수와 제자들 간에 만남의 뜻은 무엇인가요? 철저히 교회목회적입니다. ‘그(부활예수)가 나타나신 경위’를 보겠습니다. 디베랴 바다에 모인 제자 수가 일곱입니다. 이것은 일곱 제자가 일곱 교회를 대표한다는 암시합니다. 계 1:11에 일곱 교회가 등장합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베소와 서머나와 버가모와 두아디라와 사데와 빌라델비아와 라오디게아의 교회로 보내라." 이제 교회시대가 열렸다는 상징입니다. 부활예수 신앙으로 양들을 알뜰히 살피고 교회를 지켜야 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과거로 돌아갔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나가서 배를 탔다. 그러나 그 날 밤에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다.(21:3) (이 이야기도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사건과 매우 유사합니다.)

부활예수가 이들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다시 예수의 이적을 경험합니다. 밤새 허탕 친 그 자리에서 153마리 고기를 낚습니다. 그때서야 그들은 주님을 알아봅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행동을 보십시오.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시다" 하고 말하자, 시몬 베드로는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고서, 벗었던 몸에다가 겉옷을 두르고, 바다로 뛰어내렸다.”(21:7) 보통 바다에 뛰어들 때는 옷을 벗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반대로 겉옷을 입고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베드로는 왜 옷을 입었나요? 무의식의 행동인가요? 아니면? 주님께 예를 갖춘다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비록 옷이 젖더라도 주님을 만나는데 벗은 몸으로 마주할 수는 없다는 공경심으로 옷을 입지 않았을까. 무거운 겉옷을 입은 체 수영하니 매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빨리 주님을 만나기 위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조건과 사정을 너무 재지 말고 일편단심으로 주님을 섬기라는 뜻입니다. 부활예수와 제자들의 만남은 주님이 직접 제자들에게 빵과 생선을 나눠 주시는 것으로 끝납니다. 소박하든 풍성하든 주님과 제자들의 만남은 항상 먹는 것으로 장식합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부활주님이 생전 주님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모습입니다. 생전 예수는 모든 일을 먹는 것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세리와 죄인을 받아들인 후에는 반드시 뒤풀이 잔치를 했습니다. 대표적인 오병이어 이적도 먹기 위해서입니다. 엠마오 제자들이 예수를 알아본 것도 먹는 자리에서입니다. 차별없이 음식을 똑같이 나누어 먹는 자리, 곧 형제애가 가장 돈독할 때 부활주님이 그 자리에 현재합니다. 교회도 그래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 베드로와의 대화를 보겠습니다. 어째서 예수는 베드로가 무안하게 같은 질문을 세 번 반복하나요? 베드로를 다시 살리는 목회상담입니다. 주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한 허물을 똑같은 방법으로 다시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바꿔주고, 베드로를 새로운 사람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대해 가지고 있는 마음의 빚을 말끔히 지워주셨습니다. 마음의 빚이 없으면 얼마나 자유한가! 베드로가 자유한 마음으로 주님 양을 섬기도록 길을 열어줍니다. 주님이 세 차례 베드로에게 명한 말씀은 모두 “내 양떼를 먹여라”입니다. 역시 마지막 말씀도 먹는 말씀입니다.


지난 주 “승효상, 시골에 15평 ‘교회다운 교회’ 짓다” 기사를 보고 반가웠고 도전이 됐습니다. 그분의 인터뷰입니다. “정말로 교회다운 교회를 건축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차였다”며 “가난한 교회일수록 절박하고, 절박할수록 본질을 추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승 대표는 대형 교회에서 비싼 설계를 여러 차례 요청 받았지만, 거절했다고 합니다. “설계를 의뢰하는 교회들은 대부분 콘서트홀 같은 부대시설을 강조하거나, 신도들을 위한 편의 시설을 넣어 달라는 요구를 많이 한다”며 “교회답지 못할 뿐 아니라 교회의 기능을 현저하게 훼손하는 것이어서 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교회가 쇼핑센터나 회사 건물처럼 생기면 되겠느냐”면서 “교회는 누구나 들어와서 신께 기도하라고 만든 집이므로 그 기능에만 충실하면 된다고 본다”고 했습니다. 이어 “가장 본질적인 것만 남겨둠으로써 자신을 성찰하고 신과 대화할 수 있게 한 공간이야말로 교회다운 교회”라고 덧붙였습니다.


보통 경쟁적으로 교회당을 종합복지관이나 공연장 같은 건물을 지으려고 하는 풍조에서, 평신도 건축가가 이렇게 기독교 철학으로 교회건축을 했다는 게 놀랍고 반가웠습니다. 이렇게 소박한 교회당이라면 우리도 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정통이냐 이단이냐 선택에서 정통에 있다고 안주하지 말고, 하나님과 우리의 만남이 참되기를 구하십시오. 늘 교회본질을 구하십시오. 부활예수가 먹는 일로 존재증명을 하였듯이, 여러분도 참다운 형제애로 만나십시오. 서로에게 참 안식처인 교회가 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