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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기억하고 있는 책 -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도덕쌤 2023. 12. 9. 20:42

[제목만 기억하고 있는 책 ㅡ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읽지도 않고 책장의 장식물로만 남아 있는 책들도 많고 어떤 책이 출판되었다는 소식만 듣고 넘긴 책들도 많다. 아예 소식도 전해듣지 못한 책들은 또 얼마나 많겠는가. 그러니 읽고도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책들이 있다는 건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책에 감동받은 이들에게는 누군가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걸 알면 그와는 관계를 끊고 싶을 만큼 거리를 두고 싶어질 것이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란 책이 있다. 제목이 내게 준 감동이 너무 커서 바로 그 죽은 이가 누구인지 관심이 생겼고 혹시 예수에 관한 얘기가 아닌가 생각하며 책을 구입하여 읽었던 것같다. 대학생이었던 1980년대 초의 일이다. 
그러나 이 책은 예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난 책 내용을 곧 잊어버렸다. 다만 책의 제목만이 내게 살아 있어서 내 삶을 지탱해주는 작은 기둥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뒤 가끔 이 제목이 떠오르는 때가 있었다. 그 때마다 "책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서평이나 책소개를 찾아 보고는 "아하 그렇군!" 그렇게 넘어갔다. 왜 책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지 진지하게 반성해 보지 않은 채로...

오늘 이 질문을 조금 깊게 생각해 보았다. 왜 책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그 책을 다시 읽을 생각은 여전히 하지 않는다. 다만 제목이 의미하는 바에 대한 생각만 깊어질 뿐.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게 된 책의 내용은 나치하에서 전단지를 만들어 배포하는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사형당한 잉어숄의 이야기 [백장미단]이라는 독일청년단체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세 남매가 그 단체의 멤버로 활동하다 둘이 처형당했는데 살아남은 누이가 소설로 남겼고, 영화화 되기까지 했단다. 책의 원제는 [백장미단]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 출판될 때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란 제목을 달고 나왔다지.
내용을 기억할 수 없었던 (아니 기억할 수 없었던이 아니라 기억하지 않는? 아니 기억나지 않는?) 이유는 나치독일 보다 더 오랜 시간 더욱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우리 현실 때문이 아니었을까? 수시로 찾아오는 비폭력 원칙을 포기하자는 유혹, 결국 저 제국의 폭력을 물리쳤던 것은 무력항쟁이 아니었냐는, 지금도 이 땅의 전쟁이 억제되고 있는 것은 북한의 핵무력 때문 아니냐는 이야기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소식들.
백장미단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그들의 얘기까지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가 처형당했는데, '미워하지 않는'의 주어와 목적어는 누구인가? 처형당했다는 얘기는 이미 그를 미워하는 자가 있었다는 걸 드러내고 있으므로, 당연히 주어는 처형당한 이고, 목적어는 심지어 자신을 처형하고 있는 가해자들까지 포함한 모든 인류일 것이다.
과연 그러한 이가 있을까? 나는 이미 싸움터에 있고 책속의 주인공 백장미단도 비폭력이라는 방법을 고집했지만 그들도 싸우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하는 무리들을 향해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원수를 사랑하라며 예수님은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5~48, 개역개정)고 말씀하셨는데,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과 같은 존재가 아닐까? 

책의 내용은 까맣게 잊고 살면서 가끔 그 제목에 대해 묵상하게 되는 이유는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욕을 먹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국가보안법을 무기로 북한과 접촉하고 북한의 실상을 파악하고 어떻게 통일을 이룰 수 있는지 골몰할 수 있는 권리를 독점하고 있는 무리들이 북한 사람들도 우리와 한 민족이라고 굳게 믿는 그래서 같은 민족끼리 전쟁은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고 부르짖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사형까지 시키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누군가를 함께 미워하지 않는다고 자신의 '우리'에서 누군가를 밀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아마도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고루 해를 비추시고 불의한 자에게나 의로운 자에게나 고루 비를 내려주시는 분, 하느님도 결국 자신의 '우리'에서 밀어내고 있을 것이다.

그래 나는 그들을 이해한다. 나 역시 "하느님 당신이 그러고 계시니 악인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하느님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않는 분 맞습니까?" 부르짖는 날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만 자고 일어나시라고, 그 옛날 하늘빛 처럼 조율 한 번 해 달라고, 우리는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은가?
해를 비추는 일이나 비를 내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일어나는 일인가? 그럴지도 모르지만 지진이나 홍수 가뭄 산불같은 자연재해도 공평한가? '취약계층'이란 표현처럼 약한 이들에게 더욱 모진 현실인데, 약자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응원해야 하지 않을까? 하느님도 약자들의 편에 서서 계신 분이라고 하지 않는가?
악인과 선인이라는 구분과 강자와 약자라는 구분은 분명 성격이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둘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불쌍하다는 표현은 선인을 염두에 둔 표현이 아니라 약자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하느님은 늘 인간을 불쌍히 여기고 있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긴다는 것이 그 누군가에게 환영받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게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 누군가를 향해 불쌍하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스러운 일이 되었다.

아무튼 자신의 '우리'에서 밀어내고 싶다는 감정, 같은 자리에 있기 싫다는 감정, 마주하기 싫다 - 간단히 말해서 "꼴도 보기 싫다"는 감정은 미움의 감정이다.
그 분노는 강자와 약자의 구분에서 오는 것일까, 선악의 구분에서 오는 것일까? 강자가 선하지 않은 상황에서 늘 세상이 지옥처럼 변해 왔음을 생각하면 이 분별이 구분이 어려울만큼 얽혀지게 마련이다. 
선이란 약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고, 약한 자를 강한 자로 변화하도록 돕는 일이다. 그렇다면 강한 자는 어떻게 대하는 것이 선한 일인가? 사실 강한 이들에겐 어떻게 대해야 할까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강한 이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그들이 약자를 먹이로 생각하지 말고 약자를 강하게 하는 일에 관심을 쏟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기대에 부응하는 강자들이야말로 선한 사람들이다. 하느님처럼 떠받들려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선한 이들만이 강자가 되는 세상을 꿈꾼다면 그것도 복잡한 문제를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미 세상이 그렇게 완성되었다고 믿고 있고 그래서 세상의 약자들을 치워야 할 악으로 까지 미워하고 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라도(심지어 악인까지도) 자신의 '우리' 속에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선악의 구분이 아니라 강약의 구분에 집중할 때 생길 수 있는 태도이다. 악과 싸우면서도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갈 만큼 연약한 존재가 인간임을 알고 그 연약함에 대한 연민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분노는 약자들을 배려하지 못하는 강자, 배려는 커녕 먹이로 생각하는 강자들을 향하지만, 그 분노는 그들의 강함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의 분노가 누군가의 강함을 향한 것이라면 그것은 질투에 불과하다. 

이제 누가 약자인가를 생각할 때다. 그가 스스로 불쌍히 여김을 받는 일에 대해 감사의 감정을 보이든 거부 의사를 보이든 약자의 선택이겠지만,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는 자가 더 관심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더욱 크다고 더 많은 자비를 베푸시진 않는다. 그저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신다. 그리고 거부하지 않는 이들을 도우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