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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홍천에서 양수발전소 반대,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을 하고 있는 박성율 목사님이 단체톡방에 올린 글이다.
이 분은 오래도록 골프장 건설 반대, 설악산 케이블카 반대 등등, 환경을 지키고 민중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는 싸움을 해오면서, 한편으로는 철거현장의 싸움, 농민운동, 민주화 운동에 함께 연대해 온 투사다.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은해염이라는 소금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며 고향땅에서 목회를 해 왔다.
나처럼 심근경색으로 관상동맥에 스텐트를 몇 개씩 삽입한 환우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싸웠고, 아직도 싸운다.
내 삶의 확신은 예수고, 예수의 삶이 나의 삶이기 때문이다
옳은 것이기에 이길 것이다.
힘이 없기에 이길 것이다.
새로운 역사로 가는 것이기에 이길 것이다.
신음속에 절규하고
빼앗기고 쫓겨나고 죽어가는 사람의 노래소리가 있기에
끝내 이길 것이다.
그리고 싸우다 죽을 것이기에 이길 것이다.
썩고 또 썩어 이땅에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될
죽음을 부활로 이끄실 주님이 계시기에 이길 것이다."
박목사님의 신앙고백이요 기도라고 생각한다.
박목사님은 이 글에서 당신의 삶을 간단히 되돌아보고 있다. 어떻게 살아 왔는지만이 아니라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에 대한 당신의 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글의 마지막 문장 "주여 어서 끝내 주시길"에서 나는 섬찟 신경이 곤두선다.
주님이 끝내 주실 그 목적어는 무엇일까? 무엇을 끝내 달라는 이야기인가?
투쟁할 이유가 사라진 세상, 불의가 사라진 세상이 오기를 소망하기에, 이 마지막 문장을 빨리 그런 세상이 오길 염원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싸웠고, 싸우고, 싸울 것이다. 당신이 있다면.
1.
햇빛이 찬란한 날은
온몸이 타들어 오는 절망으로 가득한 날은
깊은 곳에 마음을 꺼내 들여다 본다
낮은 곳에 있었다.
낮은 곳에 있고 싶을 수도 있겠다
산을 오르고, 바다를 바라보며, 나무들과 춤을 추고,
옷을 벗고 풀속에서 뒹글었다.
바람이 몰아치고
벗은 몸 덮어 줄 낙옆 뒤로
추운 겨울 다 지나고 나면
싹이 나고 꽃필 차례가 올 것을 믿었다.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소복소복 눈처럼 고여든 네 사랑을
한 방울도 헛되이
버리지 않으려면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에 있으면 끝내
당신이 내게 밀려올 줄 알았다.
2.
목회를 하면서 교회 안에서 불의를 보았다.
죄인들이 모이는 교회가 불의하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지만
주의 종이라 자처하면서 왕노릇하는 잡것들이 판을 치는 것을 보면서 눈물 흘렸다.
눈내리는 날 쫓겨나면서 이사를 하고
살아서 숨쉬기도 어려운 날들이 이어질 쯤
교인들이 치고 받고 싸우는 모습에 질리고
아내와 아이들의 삶이 비루해 보이는 현장보다
차라리 주님의 길을 벗어나지 않는길이라면
기관 목회를 하자고 학교로 갔다.
그곳에서 영성과 전문성을 추구함이 한때 흥분되기도 했지만
존경하는 선생님의 어두운 면을 보았고
사학연금 받아 먹으면서 편안한 노년을 맞이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다시 목회 현장으로 나가길 원했다.
하지만 돈없는 나는 더 이상 목회현장으로 나 갈 수 없었다.
성직매매와 세습, 관계에 의한 청빙현장
최소한 몇천만원에서 수억이 있어야 목회현장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면 ...
나는 버림 받은 목회자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골로 내려와서 조용히 산행을 하고 약초를 캐며 농촌사역을 꿈궜다.
편안히(??) 농사 짓고 살기 원했다.
그런데 나의 삶의 터전에 골프장을 짓는다고 했다.
사람을 먹여 살려온 들녘과 산하에 사람을 죽이는 골프장을 세우려 한다 해서 반대하기 시작했다.
싸우는 과정을 겪으면서
이제 더이상 내가 믿고 의지할 나라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정부와 공무원은 절대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불의한 증거를 잡아 경찰에 조사를 의뢰했지만
경찰은 내편이 아니었다.
검찰에 의뢰했지만 검찰은 사업주의 편에 선 또다른 사냥개라는 것을 깨달았다.
판사에게 의뢰했지만 판사는 결코 약한자의 편이 아니었다.
법에게 의지했더니 그들은 법을 바꾸었다.
법은 더이상 고통받는 주민의 편이 아니었다.
불평등으로 가득해서 '정의'는 아예 없는 나라가 보였다.
절박했다. 벼랑끝에 서 있었다.
한 발만 내딛으면 천길 어두움속으로 떨어질 것이다.
내가 포기했던 교회에게 골프장 반대운동을 도와달라 했지만
말로는 돕는다 하는데 도와 주는 것은 없었다.
골프장 건설,케이블카 건설,토지강제수용을 찬성하는 교회도 있었다.
의지할 곳이 없어 거리에서 기도회를 했다.
기도해 준다던 교인들과 목회자는 나오지 않았다.
강도만난 힘없는 주민들이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시민사회단체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인원이 없다, 예산이 없다. 시간이 없다라고 하면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음은 있다는데 몸은 오지 않았다.
그들만이라도 올 줄 알았는데
이제 나는 버림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나는 트집 잡기 좋아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놈으로 규정됨도 알았다.
밤길을 조심하라며 사업자가 협박했다.
기도회를 하면 잡아 넣겠다고 경찰과 국정원이 따라 다녔다.
전화는 도청당하고, 운전하는 차는 미행을 당했다.
내 재판은 굽었고, 판결은 허망했다.
목소리가 커서 공무집행이라고 했다.
항의방문을 해서 특수공무집행방해라고 했다.
어디를 가도
쌈박질하는 목사라고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한다.
강원도청도,홍천군청도,원주시청도,강릉시청도,서울시도
나를 사람취급하지 않았다.
싸우는 동안 가정은 경제적으로 침몰했다.
"나는 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었을까?"
"누가 나를 도와 줄까?"
질문했다.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싸웠고, 아직도 싸운다.
내 삶의 확신은 예수고, 예수의 삶이 나의 삶이기 때문이다
옳은 것이기에 이길 것이다.
힘이 없기에 이길 것이다.
새로운 역사로 가는 것이기에 이길 것이다.
신음속에 절규하고
빼앗기고 쫓겨나고 죽어가는 사람의 노래소리가 있기에
끝내 이길 것이다.
그리고 싸우다 죽을 것이기에 이길 것이다.
썩고 또 썩어 이땅에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될
죽음을 부활로 이끄실 주님이 계시기에 이길 것이다.
3.
나의 소원은 부자가 되는 것도, 출세를 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소원은 마을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고 삶을 지키는 것이다.
나의 소원은 강도만난 사람과 함께하며 우는 것이다.
얼마나 무기력한지 나도 안다.
이제 나에겐 나라가 없다.
이제 나에겐 정의가 주는 은총도 없다.
나라도 없는 나는 이제 평화을 원할 뿐이다.
빈손으로 총대신 불타는 소망을 들고
거리로 나간다. 그뿐이다.
이렇게 싸우다 아내와 노후에 사랑하며 죽는 것이다.
누가 나의 가난한 소망을 가로막는가?
이런 가난한 소망은
정말 잘못된 것일까?
정말 헛된 것일까?
나는 왜 이렇게 살아가는 것일까..
모든것이 무너지는 삶의 한 가운데
나는 묻고 또 묻는다.
낮은 곳에 비가 내리고 눈이 내린다면
나는 낮은곳에 있을 것이다
눈물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그래도 오늘은 기댈 수 있는
네가 필요하다.
고난 때문에 뼈아프게 살지만
사랑하는 일은
그래도 아름다운 거니까
붙잡으려고 하면 잃어버리는
이 아픔 가득한 삶의 자리에서
나는 너무 어리석다.
주여 어서 끝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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