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백/소성리 사드저지기독교현장기도소

누구에게 용서를 빌까?(마5:23-24)(180208 소성리 아침묵상)

도덕쌤 2018. 2. 9. 06:49


2월 8일 소성리 아침 묵상

누구에게 용서를 빌까?(마5:23-24)


◎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24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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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기도회 중에 “영화 [밀양]에서처럼, 서지현 검사의 고백 동기가 된 안모 검사의 간증처럼, ‘셀프 용서’가 기독교의 용서란 말인가?”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느님이 용서하실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 오늘 말씀은 성서정과를 벗어나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택했습니다.

사람들은 심판자나 교육자의 위치에 선 이들에게만 용서를 비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받을 벌이 두려워서겠지요. 

또 어떤 이들은 피해자만이 용서의 권리를 갖는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죄책감의 정체 가운데 하나인 ‘피해에 대한 원상복구의 책임’ 때문이지요. 엎질러진 물처럼 원상복구가 불가능한 잘못에 대해서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할까요? 그러니 피해자와의 합의, 화해, 피해자의 용서가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마5:23-24)”는 말씀도 하느님은 피해자가 용서를 해 주어야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걸 알려주지 않나요? 

그러나 저는 용서를 빌게 하는 죄책감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죄인으로서 느끼는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아는 이들로부터 받을 손가락질과 따돌림이 가장 문제지요. 우리의 잘못을 누가 알고 있을까요? 심판자나 교육자나 피해자나 공통점은 가해자의 잘못을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목격자도 있겠고, 옛 속담처럼 하늘과 땅과 자기자신도 그 잘못을 아는 존재들입니다. 피해자와의 합의, 피해자의 용서가 중요한 것은 아마도 그 잘못을 가장 뼈저리게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위 질문, “누구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가?”에 대한 저의 대답은 “자신의 죄를 알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입니다. 물론 내 죄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일부러 찾아가 알려주면서 용서를 빌 필요는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장차 그도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알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면, 미리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게 좋을 수도 있겠지요?

하느님께 용서를 빌어야 하는 진짜 이유는 하느님의 심판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느님은 나의 죄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자, 교육자, 피해자, 목격자뿐만 아니라 자기 죄를 알고 있는 자신으로부터도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제각각 하느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존재라고 한다면, 사람들이 용서하지 않는데 하느님만 혼자 죄인을 용서하신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일 것입니다. 만일 이 잘못된 생각이 옳은 것이라면,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시지 않는 분이며, 우리와 무관한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재용이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용서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런 판결을 내린 심판자조차도 사람들이 용서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용서하지 않은 그들을 하느님은 용서하실까요? 그들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모르기 때문에, 얼굴에 두꺼운 철판을 깔았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