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울아버지는 우리 형제자매들에게는 무능한 가장으로서 낙인 찍힌 분이셨다.
폐결핵을 앓으면서 엄니의 무한돌봄으로 겨우 몸을 추스리셨는데, 어느 정도 회복된 뒤에는 잠시 출판사 서적 외판원으로 일하시다가 다시 그 일을 그만두시고는 친구분의 복덕방에서,나중에는 경로당에서 바둑으로 세월을 보내셨다.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회복하신 뒤에는 망상에 시달리셨고, 마지막에는 요양원에 강제로 입원하게 되었고 거기서 외롭게 생을 마치셨다. 한마디로 마누라 등쳐먹고 산 한량이라 할 수 있는 삶이었다.

가장 기가 막힌 일은 일찌감치 국가유공자로서 요즘으로 치면 보훈가족으로 등록하여 온갖 혜택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온가족이 살게 하셨다는 것이다.
사진에서 보는 모습은 1950년 전쟁 직전에 찍은 사진으로 둘째 형님이 두세 살쯤 되었을 때 찍은 가족사진이다. 이 무렵의 아버님은 경찰이셨다. 지리산에 빨치산 토벌대로 차출되기 직전에 찍은 가족사진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빨치산 토벌대로 남원 어디쯤에서 전투를 치르셨다가 바로 옆에서 동료가 죽어가는 경험을 하기도 했고, 그곳에서 훈장 세 개를 약장으로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는 당신의 삶에 대해 얘기하는 일이 매우 드물었다. 엄니의 말씀으로 큰형님을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지원병으로 끌려가셨다는데, 지원병으로 끌려가서 어떤 경험을 하셨는지도 말씀이 없으셨고, 타고가던 군함이 침몰하여 바다에서 오랫동안 구명조끼만을 걸치고 바다에 떠 있어야 했었다는 얘기만 들었다. 해방 이후 경찰이 되셨다고 하는데 경찰로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도 들은 기억이 없다. 나중에 빨치산 토벌대로 남원 어디쯤에서 전투를 치르셨다가 바로 옆에서 동료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얘기는 어쩌다 들은 적이 있지만, 그곳에서 무슨 공을 세워서 훈장을 받았는지는 말씀이 없었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이 훈장을 보훈처에 등록하여 보훈가족으로 인정받았으면 아버지의 취업문제나 자녀들의 진로에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지 모를 일인데... 왜 그리 감추어두고 계셨을까? 
누군가는 오히려 출세와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던 친일과 반공투사로서의 경력들을 당신은 너무너무 부끄럽게 생각하셨던 것인가? 그 부끄러운 역사속에서 우물쭈물 걸어간 그 길을 잊으려 망상의 세계로 도피하셨던 것일까?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