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백/사진으로 엮는 자서전

내 삶의 첫 번째 기억에서부터 시작하는 얘기

도덕쌤 2014. 3. 25. 09:46

 

사십여년 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어떻게 그동안 살아왔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참 망설여지는 이야기것지.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하다가 웰다잉공부를 하다 주워들은 [사진으로 엮는 자서전]을 써보기로 했다네. 이게 그 첫 시작이지.

 

자네들에겐 가장 어릴 적 기억이 어떤 것이었나? 몇 살 때쯤? 어떤 사건?

대학신입생 시절 백인과의 대화라는 수첩을 만들어 몇 가지 질문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인터뷰를 하고 돌아다니던 때가 있었네.

그 때 어느 여학생은 엄마 뱃속에서 바알간 태양을 느꼈던 기억이 최초의 기억이라고해서 놀랐었지.

난 그 여학생의 비범한 기억력이 부러웠었네.

 

 

나의 가장 어린 시절 기억은 아마 여섯살 무렵, 대사동 토굴같은 무허가집에서 공주로 이사가던 날의 기억이라네.

이웃에 살던 이름도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 친구와 화장실에서 서로 고추를 걸고 약속하며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했었는데, 지켜지지 않은 약속이었다네. 얼마 안 가 얼굴도 이름도 잊어버려서 그동안 만났어도 만난 줄도 모르고 지나갔겠지.

대사동집으로 이사온 친구의 얼굴이 기억나네. 유난히 이목구비 일곱개 구멍이 모두 작았거든. 그 작은 구멍으로 어떻게 숨쉬고 말하고 듣고 볼 수 있는지 참 신기했었네.

 

공주에서의 추억은 늘 아름다운 기억이었네.

목탁을 가지고 놀다가 형에게 안 뺏기려고 용쓰다 넘어져 입술을 꿰매야 했던 아픈 기억도 있었지만,

공주농고였었나? 국화전시회에 처음 가서(그게 그런 전시회였는지도 그땐 모르고 그저 누나가 이끄는대로 따라갔던 것 뿐이었네만) 맡았던 진한 국화향기. 지금도 그 향기가 코끝에 배어 있다네.

아마 성탄절이었겠지. 그리고 교회였을 거야. 그때는 다섯살 위 누나 손을 잡고 졸래졸래 따라다녔을 뿐인데, 아무튼 맛있는 사탕과 반짝이는 트리와 아름답게 울리던 찬양이 나를 사로잡았었지.

아버지와 함께 했던 천자문 공부와 버스 여행도 생각나네. 어느 출판사 외판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여기저기 다녔었는데, 아버진 천자문을 외운다고 아들 자랑하고파서 나를 잘 데리고 다니셨나봐.

공주봉황국민학교에 입학하고 곧바로 앓게 된 홍역으로 한달을 결석했고, 열병을 앓고나면 더욱 머리가 똑똑해지는 건지, 그때부터 선생님들께 칭찬을 많이 받았었다네.

입학하던 날 찍었던 기념사진도 있었는데, 언제 잃어버렸는지…. 수첩에 넣어가지고 다니다가 소매치기를 당했던 거 같어.ㅠㅠ

그때의 사진을 보면 누구나 쉽게 내 모습을 찾을 수 있었는데, 눈을 가장 크게 뜨고 있었거든.

사진사가 여기를 보라며, 눈을 크게 뜨라고 몇번씩 강조하였었지. 난 선생님 말을 엄청 잘 듣는 어린이였었어.

난생 처음 극장에서 영화도 보았었고, 나중에 고분이 발굴된 무령왕릉 언덕위에서 뛰어놀기도 하고, 금강백사장에서 가족들이 놀았던 기억도 있네. 아무튼 내 인생에 아름다운 첫경험들은 대체로 공주에서 만들어진 셈이야.

아! 사생대회에서 입상하고 충남도대회에 나갔다가 처음 먹은 짜장면과 이어진 설사. 그때 생긴 트라우마로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못했었던 아픈 기억도 있었구먼.

 

 

2학년 중간에 다시 대사동집으로 이사를 나왔고, 대흥초등학교로 전학을 왔지.

엄청나게 많은 학급수와 오전반 오후반 교대로 수업해야 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었지.

가난했던 시절. 연필 닳는 게 아까워 침을 꼭꼭 묻혀야 써지는 흐린 연필심만 가졌던 난, 시험지에 쓴 답을 선생님이 읽지 못해, 정답을 쓰고도 틀렸다고 채점받는 기막힌 경우를 당하면서, 선생님들께 불신을 키우게 되었다네.

3학년 시절, 난로가에서 졸다가 뜨개질 하던 털실을 태우고 애꿎게 학생들에게 화풀이를 하던 선생님도 기억나는군.

아마 이 무렵부터 난 우리집의 가난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아.

집앞의 넓은 밭들이 이층 양옥집들로 채워지고, 새로 이사 온 친구들과 놀다보면 은근히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었지.

놀이의 규칙보다 누가 더 힘이 센가로 승패가 갈라지는 그런 경우가 참 많았었다네.

그러면서 4학년을 맞고 느닷없이 새로운 학교가 생긴다며 보운국민학교 학생이 되었어.

 

학교는 여전히 대흥국민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빌붙어 사는 셈이라서 괄시를 많이 받았다네.

같은 동네엔 뒷구멍으로 힘을 썼는지 보운국민학교로 함께 넘어오지 않고 여전히 대흥국민학교에 남아 있던 친구도 있었고,

아무튼 난 그렇게 강제로 내 첫 짝사랑 3학년때 짝꿍과 헤어지고 보운국민학교 학생이 되었어.

그게 너희들과의 인연의 시작이었어.

 

빈부의 격차와 힘의 강약에 따라 무시하고 무시받는 그런 세계에 울분을 많이 느꼈던 시절인데, 울분을 느낄 때마다 지붕위에 숨어 하모니카로 슬픔을 달래던 시절이었는데, 돌아보니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나봐.

소풍을 가서 친구들과 찍은 사진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 사진. 용문이를 그리워했던 이유가 바로 그랬던 거야, 그 시절 나를 분노의 세계에서 끌어내 줄 수 있었던 친구.

돌아보니 그런 친구들이 많이 있었더군. 중학교에 가서 새롭게 만났던 보운국민학교 친구들 중에 창수, 윤호, 명철이, 현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