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백/사진으로 엮는 자서전

어쩌다 떠오른 어린 시절 - 딸의 도둑질을 알게 된 아빠 도둑

도덕쌤 2023. 12. 9. 08:37
[어쩌다 떠오른 어린 시절]
 

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라고 불리웠다) 6학년 시절이었는데, 밀가루 수제비로 연명하던 우리집 형편이 더욱 나빠져서 밀가루를 아끼느라 밀가루에 두부공장에서 나오는 비지를 섞어 수제비를 끓여먹던 시절이었다.
학교에서 선생님의 추천으로 선생님의 인솔을 따라 어느 백일장인지 뭔지 무슨 대회에 나갔다. 주최한 단체가 어떤 단체였는지도 그게 어떤 대회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곳에서 대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교통비를 주었는데 내가 받은 돈은 당시 돈 500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비는 선생님이 내주었기 때문에 그 돈은 고스란히 내 수중에 남아 있었다.
당시 만화가게에 가면 만화책 두세 권에 1원인지 10원인지 내고 빌려보았으니 500원이면 얼마나 큰 돈이었는지... 난 그 돈을 숨겨두고 행복해 했었다.
어느 날 산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던 엄니를 만나러 갔다가 산에서 잠을 자고 돌아온 아침, 마침 집에 모든 먹거리가 떨어져 식구들이 모두 굶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날 숨겨둔 500원을 내어놓으며 당장 국수를 사다 삶아 먹으라고 하고는 학교로 줄달음을 쳤다.


바로 이러한 기억들 가운데 오늘 새삼 궁금해지는 것은 ㅡ 그 때 무슨 대회인지 기억도 못할 정도로 아무 관련 없는 어떤 낯선 사람들이 어떤 대회를 개최하였는데 그 주최 단체가 어떻게 대회 참가자들과 인솔교사들에게 교통비까지 주어가며 대회를 치를 수 있었는지...
정말 아무 것도 모르지만 그분들의 손길을 통해 우리집의 처참한 가난이 잠시 구제를 받았다는 기억이, 그때 숨겨둔 500원을 내놓던 나의 마음속을 휘저었던 이상한 감정들이 그 행사를 주관한 이들에 대해 궁금하게 만든다.


더불어 그때 인솔교사였던 담임선생님이 생각난다. 훗날 초딩동창친구들이 유난히 차별이 심했다고 기억하는 선생님이 6학년때 담임선생님인데 그렇게 가난했던 시절 촌지 한 번 가져다 준 적 없는 나를 선생님은 무척이나 아껴주셨었다.
졸업식 기념 사진도 찍을 형편이 못되어 졸업식을 마치자마자 그냥 집으로 돌아왔다가 누나들이 세상에 그럴 수 있느냐며 친구에게 카메라를 빌려 다들 돌아간 텅빈 학교를 찾아가 그때까지 퇴근하지 못했던 담임선생님과 누나와 여동생 그렇게 사진을 찍었었다. 아쉽게도 그 어린 시절 사진을 다 수첩에 가지고 다니다 소매치기를 당하면서 모두 잃어버렸는데, 여전히 그 싸늘한 바람 불던 2월의 초등학교 졸업식, 추위에 오들오들 떠는 동생과 누나의 모습이 고스란히 박혀 있던 그 사진은 뇌리에 박혀있다. 그날 선생님은 졸업식이 끝나고 모두 식사를 하러 학교를 비웠는데 누가 어떻게 연락을 했었던가 아무튼 연락을 받고 우리 오누이들을 기다려 사진촬영에 임해주셨다.
촌지도 밝히고 차별도 심했던 분이라고 알려진(나는 그 당시 전혀 몰랐지만) 그런 분이 처참하게 가난했던 내게 그런 배려를 해주셨던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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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너무 아플 때가 있다. 나의 경우엔 대부분 인간관계가 깨어지는 아픔이 육체적 고통으로 전이되면서 오는 현상이다. 그 인간관계가 직접 나와 연결되는 관계이든 내가 몸담고 있는 집단안에서 벌어지는 사랑하는 이들과 사랑하는 또 다른 이들의 관계이든, 아무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관계가 깨어지는 걸 목격하면 언제나 피골이 상접하도록 몸살을 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처음부터 나를 알지 못하는 생판 '남'인 사람들이라고 해도 좋을 그저 낯선 이들처럼 존재하는 '인류'라고 하는 집단을 향하여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는 성경의 말씀처럼, "결국 진보하리라", "결국 이겨내리라"... 그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런 믿음의 원천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돌아보다가 어린 시절 가장 가난했던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아마 실질적인 구원을 경험한 기억이 바로 이것이었을 거다. 이름모를 글쓰기 대회를 주최했던 그 사람들, 나를 특별히 배려해주셨던 담임선생님.


그날 글쓰기 대회에 관해서 다른 것은 다 기억을 잃었는데도 그날 무엇을 주제로 글을 쓰게 했던가는 기억이 조금 남아 있다. 라디오 방송극처럼 어떤 얘기를 들려주고 그에 대한 소감을 쓰라는 것이었는데, 그 극의 줄거리는 아내도 없이 오직 딸 하나를 애지중지하며 키우던 도둑이 그 딸이 아버지처럼 도둑질을 한 것을 알고 너만은 이렇게 살지 않도록 키우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어쩌고 하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도둑의 입장을 변호하려고 애썼던 것같다. 그 딸에게 하느님같은 존재인 아빠라면 도둑일지라도...

잃어버린 사진 이야기에 이 사진들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작은 누님(당시엔 서울에 있어 졸업식에 오진 못했다)이 페북 댓글로 전해주었다. 아아! 얼마나 고마운 누님이신지!!!)
이 사진을 보니 누군가 이웃(아마도 내 뒤에 서 있는 분?)의 도움으로 이 사진 한장 찍었었나 보다. 위에 선생님과 찍은 사진과는 달리 뒤에 사람들이 아직 남아 있다. 선생님과 찍은 사진은 카메라를 빌려 다시 와서 찍은 게 분명한데 그 카메라도 내 뒤에 서 있는 분이 빌려온 카메라였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