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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누님이 감을 수확해달라 해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 보문산 자락 대사동 옛날 살던 동네를 들렀다.
보문산에서 내려오던 개천은 복개하여 도로가 되어버린 지 오래.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식당이 들어서 있었다.
일단 차를 주차할만한 곳을 찾았는데, 옛날 제일인쇄소로 기억되는 넓은 집터가 주차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차 한 대가 통행할 만한 도로가 입구에서부터 옛날 대연각이라 불리던 당시 신흥주택가까지 직선을 뚫려 있는데, 옛날 우리집 앞집이었던 목선생네와 뒷집 남씨네 땅을 통과하여 제일인쇄소와 목선생네의 골목은 옛모습을 잃고 있었다.
정원마당을 도로로 빼앗긴 옛날 우리집 앞집 목선생네집은 담장이 건물쪽으로 당겨져 있고
뒷집 남씨네도 마당을 비스듬히 빼앗겨 'ㄱ'자로 막혔있던 골목이 시원스레 길로 뚫려 있었다. 접시형 안테나가 있는 집이 옛날 우리집.
위에서 부터 목선생네집 문앞에서 조금 들어간 공간. 감나무집앞. (좁은 골목을 나가면 가게와 만화방이 있었다. 사진에 보이는 감은 감나무집이 아니라 그 앞집으로 또래들 중에는 딸들만 있었고, 딸부자네로 불리던 집이다.) 그리고 태영이네 집 앞 (태영이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짝꿍으로 만나 태영이 엄마의 부탁으로 나는 그의 가정교사처럼 행세했었다. 아기 때 보약을 잘못 먹여 지능이 떨어졌다는 태영이는 당시에 아명으로 경범이라 불렸고, 그 집에 있는 동화책 전집들은 경범이 대신 내가 모두 읽었다.)
비교적 옛모습이 많이 남아 있는 이 곳이 어린 시절에는 광장으로 느껴지던 곳이었고, 새로 이사온 친구들과 노는 놀이터였다. 이 곳은 원래 밭이었는데, 초등학교 2학년 무렵부터 많은 집들이 지어졌고, 새집으로 이사온 사람들은 찢어지게 가난했던 우리와는 달리 잘 먹고 잘 사는 집들이었다. 새로 이사온 친구들과 놀다보면 싸움판으로 끝날 때가 많았는데 놀이규칙을 가지고 언쟁을 벌이다 보면 누가 더 힘센가, 누가 더 군것질을 잘 시켜주나가 규칙보다 중요해졌다는 게 당시의 내 생각이었고, 그래서 나의 열등의식이 끝까지 물고늘어지는 쌈닭이 되게 하였다.
옛날 우리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이다. 골목길 입구에서 바라본 우리집. 뒷집 남씨네와 경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계량기가 붙어 있는 붉은 벽돌부분이 우리집 화장실이었던 것같은데...
집앞 골목이 이렇게 좁았는데 여기서 구슬치기도 하고 고무공같은 것으로 골목축구도 하고 그랬다.
골목이 꺾이면 오른쪽에 뒷집 석원이네가 몇 대째 터줏대감으로 살고 있었다. 우리는 문의에서 대전으로 나와 여기저기 셋집을 전전하다 이 집을 사서 들어왔는데, 일곱째는 이사오기 전 집에서 태어났고 막내는 이집에서 태어났고 막내 낳고 얼마 안 되어 공주로 이사갔다가 돌아왔으니, 터줏대감으로 살고 있는 석원이네에게는 우리도 외지인이었을 것같다. 동갑인 석원이 보다 그 동생 석모가 나와 더 잘 놀았다. 오른쪽 붉은 벽돌은 우리 바로 옆집 순옥이네. 순옥이네는 얼마 뒤 이사가서 기억에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서울에 올라와서도 작은 누님과 소통하던 영애누나가 살던 집이다.
석원이네 집에서 내려가는 가파른 골목길. 이 길이 보운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라 불렀다)로 가는 주통학로였다. 이 아래 사는 친구들은 다소 거칠어서 함께 노는 걸 피했는데, 어떨 때는 보문산에서 내려오는 큰 길을 따라 학교를 가기도 했다.
석원이네 집 앞골목. 왼쪽의 담장은 당시에는 없었다. 골목끝에는 노랑대문집이라고 엄니와 잘 통하던 분들이 살고 있었고, 그 오른쪽에는 석원이네와 같은 성을 가진 배씨네집이었는데, 남씨네와 붙은 배씨네집에는 내게 5년 내지 7,8년 형아들이 있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형들은 우리같은 조무래기들을 모아 스카우트처럼 놀게 해줬고, 덕분에 보문산에도 함께 올라가고 개천에서 물고기도 잡고 국경일에는 태극기 게양하라고 골목을 쏘다니며 일종의 계몽운동도 하고 그랬었다. 그 형들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청년지도자로 성장할 것을 어린 시절에도 기대하고 존경의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그 중에 큰형이 동해안 피서지에서 누군가를 구조하다 함께 익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집은 얼마 후 동네를 떠났지.
석원이네와 순옥이네 사이의 좁은 틈. 석원이네 쪽은 당시에 경량철골조가 아니라 기와집이었다. 그 틈사이로 보이는 파란 지붕이 옛날 우리집인데, 이 사진을 찍어 둔 이유는 그 파란지붕이 있는 곳이 옛날 새로 이사온 친구들과 싸우고 친구엄마에게 혼나고 울엄니나 형한테 혼나고 나면 설운 마음을 풀어내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쪽방 창문으로 기어나와 지붕위로 올라가서 하모니카를 불고 있으면 다들 하모니카 소리에 누가 어디서 부는 것인지 궁금해 했는데 교묘하게 가려져 있어서 벌떡 일어서기 전에는 아무도 나를 찾지 못했다. 저곳이 내 마음을 치유하던 곳이란 말이지.
여기가 여덟째인 막내 정혜의 생가. 나중에 기념표지판이라도 붙여둘 수 있을까? 부모님과 여덟 남매가 함께 지내기에는 너무 좁은 집이었다. 게다가 왼쪽 순옥이네와 맞붙은 곳은 세를 내주어 기철이네가 살고 있었으니... 명절에 온가족이 다 모이면 엉덩이 붙일 곳이 없어 마루나 골목길에서 서성여야 했고, 평소에는 위로 사남매는 각기 딴 살림을 하고 있었다. 큰형님은 공주에 살 때부터 출가상태였고, 둘째형님은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기숙을 했고 졸업 후에는 취업하며 따로 살았다. 누님 두 분은 초등학교 졸업 후 미싱사의 길을 걸었고 얼마 뒤에 서울 평화시장에서 일했다. 그래도 나머지 여섯 식구가 살기에는 여전히 좁았던 집이었는데.... 이 집을 떠나 수도산 아래 지금 큰누님이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한 것은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 쯤이었다. 큰누님이 모은 돈으로 집을 샀는데, 그 때 쯤에는 나도 주거주지는 서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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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살던 곳을 돌아본 김에 보운초등학교도 찾아보았다. 3학년에서 4학년 올라가면서 문창국민학교와 대흥국민학교의 학생들 일부(부사동과 대사동 거주)를 떼어내어 보운국민학교가 생겼다. 건물이 완공되기 전이라 더부살이로 한 학기를 보내게 했기에, 새 학교에는 4학년 2학기부터 다니기 시작했다. 졸업생은 바로 윗학년부터 배출했다. 내가 2회 졸업생, 일곱째 은총이 4회, 막내 정혜가 7회 졸업생이다.
더부살이를 하는 동안 받았던 설움 때문에 새 학교에는 처음부터 애착이 깊었다. 뿌리가 다르다보니 부사동 패거리와 대사동 패거리가 가끔 다투기도 했지만 비교적 가정환경이 비슷해서 대흥국민학교 시절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대흥국민학교는 중학교 입시가 있었던 시절 대전의 명문학교로 이른바 3D (대흥국민학교-대전중학교-대전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곳이라서 학구가 보운초등학교에 해당되었어도 일부 돈많고 빽있는 집 아이들은 계속 대흥국민학교를 다녔었다. 3학년때 친구 경범이도 그렇게 대흥에 남은 친구였다. 그렇다보니 문창 출신이냐 대흥 출신이냐 서로 으르렁거리면서도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위는 어제 찍은 사진이고 아래는 1972년 2월 졸업식 때 찍은 졸업사진(큰누님과 담임선생님)이다.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얼마나 달라졌는지 구체적으로 비교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래는 학교 주변. 학교 뒤 공설운동장은 학교와 작은 도랑을 사이에 두고 있었고, 그 도랑에서 공설운동장 쪽은 습지에 가까워 놀이터로 삼기에 부적절한 곳이었는데, 이렇게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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