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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그림을 보고 서로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듯이 같은 사건을 경험한다고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누군가의 죽음을 함께 목도했다고 우리가 모두 한마음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말자.
그러나 저마다 다른 생각,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고 해서 어떤 생각 어떤 태도든 모두가 좋은 생각, 좋은 태도라고 볼 수는 없다.
바로 이 것을 이해해야 한다.
어떤 생각 어떤 태도가 좋은가? 어떤 생각은 왜 나쁜가? 자신이 늘 가던 길대로 가고 마는 것이 아니라 가던 길을 멈추고 어느 길로 가는 게 좋을지 생각하는 그것이 중요하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너도 죽는다는 것을 아느냐?
이 질문은 가던 길을 멈추고 어느 길로 가는 게 좋을지 생각하게 할 가능성이 높은 질문일 뿐이다.
학살의 시대 누군가를 학살하고 있던 그들은 이런 질문을 받고 잠시라도 멈추고 생각을 했을까? 이런 질문을 받으면 그들은 오히려 "그래서 어쩌라구?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냐? 나도 학살당할 거라 저주하는 거냐?" 더 광분하지 않을까?
로마로 돌아오는 개선 장군이 소년 노예를 시켜 외치게 했다는 "메멘토 모리"는 장군이 듣고 싶어한 충고라기 보다 반역을 꿈꾸는 자들, 정복자 로마에 항거하는 무리들에게 "다음은 네 차례야"라고 경고하는 소리가 아니었을까?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너도 죽는다는 것을 아느냐?
이 질문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이미 더 좋은 길로 나아가려는 마음이 내장된 사람들이다.
나는 단지 그들이 자신이 걸어온 그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가장 좋은 길이었다고 맹신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1977년 11월 12일 아침 도서관으로 배달된 신문을 펼치다 1면에 가득한 사진을 보고 충격에 온 몸을 떨었다. 전날 이리역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했고 그로 인해 이리역 주변은 전쟁터에서 폭격을 맞은 것처럼 폐허가 되었고 수십 명이 죽고 수천 명이 다쳤다는 소식이었다.
그날 아침,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안타까워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마 어떤 사건, 사고 소식을 들으며 가슴 아파하며 기도했던 첫 번째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그 때 내가 드렸던 기도는 무엇이었나? 내가 드린 청원은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사람들을 지켜달라는 것이었지만, 나는 청원보다는 더 많이 하느님께 묻고 있었다. "사고로 죽은 사람들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 삶이었을까요?" "모든 삶과 죽음을 주관하신다는 하느님! 이들의 삶을 이렇게 거두어가신 당신이 남은 사람들에게 하시고픈 말씀은 무엇입니까?"
나는 그 뒤로도 자주 이런 질문을 드렸다. 여전히 멈추지 않는 비극적인 죽음의 행렬들을 대하며....
이제 나는 하느님께 묻지 않고 스스로 묻는다. "너는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고 싶니?"
메멘토 모리! 이 말은 잠시 가던 길 멈추고 생각해 보라는 요청이다.
"당신은 어떻게 살다 어떻게 죽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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