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안식년을 마치며]

    지난 목요일 아침, 제가 7년 넘게 싸워 온 소성리 마을에 검사들이 압수수색을 진행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목요일 평화행동을 하는 날이었는데, 추운 날씨와 얼어붙은 길이 걱정되어 피켓팅만 하기로 했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틈을 타, "사드를 이곳에 못 박은 정권의 수뇌부가 사드 배치를 지연시키려 우리들에게 비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소성리 사람들의 핸드폰과 각종 자료를 압수해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 사이에 우리가 그토록 막으려 했던 사드 기지 운용을 위한 유류 공급 차량(항공유를 가득 실은 미군 차량)과 미군을 태운 버스들이 유유히 지나갔습니다. 초기에는 이런 차량들이 모두 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려 헬기를 이용했었는데.

    소식을 듣고 저는 생각해 봤습니다. "내가 여전히 거기 있었다면 어떻게 대응했을까? 어떤 선택을 했을까?" 이 이야기는 오늘 편지 후반에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오늘 편지는 소성리를 떠나 안식년을 지내 온 제가 그 동안 성찰 해온 결과입니다.
    회고록인 셈입니다. 어쭙잖게 기독교 신앙을 가진 투사로서 살아온 과정을 돌아보고, 그 안에 제 반성을 담았습니다.

 

1. 어두운 죽음의 시대

    우리가 살아온 시대는 [친구2]라는 노래 가사처럼 ‘어두운 죽음의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 광주 5월 이야기를 듣고부터 소성리에 이르기까지, 저는 이 노래가 전하는 그 마음으로 투쟁해 왔습니다. 그 가사가 이렇지요.

“어두운 죽음의 시대
내 친구는 붉은 눈물 붉은 피 흘리네 

역사가 부른다
멀고 험한 길을
북소리 울리며 사라져 간다

친구는 멀리 갔어도 없다 해도
그 눈동자 별빛 속에 빛나네

내 맘속에 영혼으로 / 살아 살아
이 어둠을 사르리 사르리
이 장벽을 부수리 부수리”

    성경 속의 예수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로마 시대의 사형 도구로, 사형당할 사람이 직접 짊어지고 사형장으로 걸어가야 하는 것이었지요. 스스로 죽어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한다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얼마나 많은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는지요. 전태일 열사를 비롯해 이름 없는 변사체로 발견될 수밖에 없었던 빈민 투사들까지, 투옥과 고문 끝에 죽거나 변절해야 했던 영혼들이 있었습니다.

 

2. 어린 날의 기억

    저는 어릴 때 동네에서 쌈닭처럼 친구들과 싸웠습니다. 애들 싸움이 어른들 싸움으로 번졌고, 재판에서 지고 부끄러움에 동네를 떠난 친구네가 생각납니다.  
    그 싸움 이후로 저는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싸움도 있었지요

    재수할 때였어요. 어떤 친구가 웃으며 인사하는 저를 보며 “너는 바보냐? 뭐가 즐거워서 매일 웃냐?”며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날, 상처받은 자존심에 벌떡 일어나 싸우려다가 문득 칼부림이 일어나는 상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지요. 이깟 일이 얼굴에 상처를 남길 만한 일인가? 목숨을 걸 만큼 중요한 일인가?  
    그 순간 정말 바보처럼, “너는 웃는 게 싫으냐?”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책상에 엎드려 상처받은 자존심을 감췄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잠시 후 그 친구가 나에게 사과를 한 것이었어요.  

    그때부터 저는 투쟁에 나설 때마다 늘 이 싸움이 목숨을 걸 만한 싸움인가, 어디까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가를 고민했습니다. 또, 설령 진다 하더라도 싸워야만 하는 싸움인지, 승리의 날이 먼 훗날 오더라도 내 목숨을 먼저 바쳐야 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묻곤 했습니다.

  

3.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 온다면?

    이런 상황에서 가장 두려운 생각은 '내가 혹시 변절하게 되지 않을까'라는 것이지요.   
    저는 변절자들을 향해 손가락질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가엾게 여길 뿐이지요. 왜? 저도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싸움에 임하기 때문입니다.
    변절자들이 변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를 때에, 저는 늘 먼저 안전지대에 가 있었습니다. ([안전지대]라는 제목의 습작시를 썼었는데 링크를 따라가 읽어 보십시오.) 그러니 '친구2'라는 노래를 읊조리며 비장한 각오로 투쟁현장에 있다가도, 늘 안전지대에만 머무르고 있는 제가 변절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4. 투사로 싸웠던 기억들(1) - 대학생 시절

    저는 저 살인자들에게는 어떤 정보도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을 때에만 일을 저질렀어요. 체포와 구금이 기다리는 일에서는 언제나 안전지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1980년 가을, 서울대 관악캠퍼스 붉은 벽서 사건. 다른 일로 붙들려간 엉뚱한 친구들이 고문당했지만 누구도 그 사건을 일으킨 사람을 알지 못했어요. 페인트 묻은 옷과 신발을 처리하고 새 신발과 옷으로 갈아입을 때 곁에 있었던 고교선배만 알고 있었지요. 기껏해야 건물 외벽에 붉은 페인트로 “살인마 전두환은 물러가라!”고 써놓은 일이었습니다.   
    새벽에 직원들과 기관원들이 벽서를 덧칠해 감췄기 때문에 실제 그 벽서를 본 학우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애꿎게 그 일로 추궁당하고 고문당했던 사람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때였어요.  

    그런 일을 벌이고 난 후, 3학년에 올라가면서, 누군가는 노동현장으로, 누군가는 학내시위 주동자로 자신의 십자가를 질 각오들을 할 때였습니다. 저는 소시민운동을 하겠다며 나는 불타오르는 소시민이 되겠다.”라고 각오를 밝혔지요. 제 각오를 들은 한 친구는 타다만 장작개비는 되지 마시오!”라고 씁쓸한 표정으로 말하며 노동현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는 서클활동을 중단하고 졸업 후 교사의 길을 걸을 수 있기만을 기다렸습니다.

 

5. 투사로 싸웠던 기억들(2) - 전교조 활동

    참교육 운동, 교육민주화 운동을 한다고 평교사협의회 활동을 하던 당시, 저는 해직을 각오하며 활동을 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전교조로 전환한다고 했을 때, 저는 반대했지요. 교사협의회 활동도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했는데 전교조로 전환하다는 것은 대량으로 해직 사태를 몰고 올 게 틀림없었습니다. 동지들에게 이를 각오하고 있느냐 물었지요. '예'라고 대답했던 많은 동지들이 탈퇴각서를 썼습니다. 전교조는 결국 많은 동지들에게 탈퇴각서를 쓰고 현장조합원으로 남아 있도록 하였지요. 저는 이 과정에서 끝까지 해직을 각오하고 덤벼야 할 싸움인데 뭐하는 짓이냐고 비판했습니다.

    이후 저는 출근투쟁에 올인하며 학교 앞에 거리의 교실을 열고 매일 나갔습니다. 이제는 체포, 구금, 죽음을 각오해야겠구나 생각했지요. 그때 분회보에 “만일 내가 자살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코 인정하지 마라. 나는 자살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전교조는 해직된 조합원들의 출근투쟁이란 것을 하기로 했지만 얼마 못 가서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싸울 줄도 모르는 것들이 싸움을 크게 벌여 선생님들 성분분류 작업만 해냈다고 혹독하게 비판했습니다.

    이후 대부분의 해직자들은 생계활동에 매달리게 되었고, 저는 당시에 백혈병으로 먼저 간 아들을 간호하느라 병원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녀석을 보낸 후에는 저도 생계활동으로 시간을 보냈지요.

    몇 년 후 전교조는 김영삼 정부와 협상하여 해직교사들이 전교조 탈퇴각서를 쓴 후 신규특별채용 형식으로 복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는 겨우 이러려고 해직된 것이냐, 이 따위로 싸운다면 나는 아예 그만 두겠다, 위장 탈퇴각서가 아니라 진짜 탈퇴하겠다고 선언했어요. 복직하면서부터는 전교조와 아주 이별했습니다.

 

6. 투사로 싸웠던 기억들(3) - 예수살기를 만남

    복직한 후 몇 년 만에 나에게는 가르치는 능력이 정말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표를 던지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살았어요. 창덕여중에서 마지막에 심근경색이 찾아왔을 때에는 한계를 느꼈습니다. 한강중으로 옮기면서 어렵게 두 해 만에 명예퇴직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를 떠난 후, 2014년 4월에 세월호 사건을 만났어요. "나도 아이들을 죽이는데 일조한 사람"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세월호 광장에 거의 매일 나갔어요. 유가족들의 투쟁을 지켜보며 응원하는 것이 다였지만, 거기서 함께하는 기독교인들을 만났습니다. 예수살기라는 이름처럼 예수를 살아내는 분들이었어요. 교회에서 목회자를 섬기던 마음으로 그 분들을 섬기고자 했지요. 그러면서 예수살기의 사무국장으로 일하게 되었고, 전국 곳곳의 투쟁현장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곳곳의 투쟁현장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제 건강상태가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심근경색에 더하여 허리통증과 광시증으로 시달렸어요. 예수살기 동지들이 제 건강을 걱정하여 쉴 것을 권유했습니다.

 

7. 투사로 싸웠던 기억들(4) - 소성리에서

    저는 이때쯤 마지막 목숨을 바쳐 싸울 곳을 찾는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소성리 생활은 어땠는지 동지들이 잘 알고 있으니, 여기서는 제가 어떻게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건지, 에피소드 몇 개만 얘기하겠습니다.

    소성리에 2017년 4월 18일 내려갔는데 4월 26일 기습적으로 사드발사대가 들어갔어요. 그날 대성통곡을 하면서, 이 나라가, 대한민국이 미국의 식민지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지요.

    4월 30일, 유조차가 들어오는 걸 막을 때, 해머로 차량유리를 부수며 차안에 있는 사람을 끌어내는 경찰들에게 분노했습니다.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트럭위에서 경찰들을 향해 날아 뛰었습니다. 다치는 건 생각도 안 했지요. 하지만 아무일도 없었습니다. 체포하여 연행하려던 경찰이 찢어진 바지 사이로 내비친 허연 허벅지를 보고 그냥 내버려 두었어요.

    9월 6~7일 문재인 정권이 발사대 추가배치를 허용하여 사드를 못 박았던 날. 장비 진입을 막으려고, 동지들 가운데 일부는 트럭에 목줄을 잠그고 몇 시간을 버틸 생각이었습니다. 저도 그 일에 자원했습니다. 그러나 심근경색으로 계속해서 매일 약을 복용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동지들이 강력하게 말렸어요.

    언젠가는 절개지에 올라갔던 적도 있었습니다.   
    매번 처절하게 반복되는 경찰의 폭력을 중단시키고 싶었습니다. 사드기지 한국 측 최고 책임자에게 공사 장비 반입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며 혼자 농성을 한 거지요. 다행히 사드기지의 김대령과 성주경찰서장이 그날 하루 작전을 중단하고 타협에 응해 무사했습니다.
    이 날 제 요구가 무시되고 경찰과 군이 작전을 그냥 강행했다면 저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그때부터 많은 분들이 제 투쟁방식을 걱정하고 또 어떤 일을 저지르진 않을까 염려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의 퍼포먼스를 수행했을 뿐이라고 안심시켰지만, 모두 제 투쟁방식을 경계하기 시작했지요.

    이후 지킴이로서의 활동에 매진하면서 화요일 목요일의 아침평화행동은 물론 거의 매일 아침기도회, 정문앞 평화행동 및 1인시위, 오후평화행동,  미군버스 및 유조차 출입시에 차량 항의방송 등을 하면서 소성리를 지켰습니다만 마음속에서는 이제 곧 결전의 날이 다가올 텐데 하면서 온갖 상상을 다했습니다. 특히 오후에 회관앞에서 할머니들과 퇴근하는 차량들을 향해 항의하는 평화행동을 하면서 할머니들을 쉬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8. 이제야 깨달은 예수님의 투쟁 방식

    소성리에서의 제 투쟁방식은 '목숨을 던져 나를 밟고 지나가라'고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동지들도 그렇게 외쳤지만 사실 그런 각오로 싸우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퍼포먼스에 불과했는데, 저는 실제 그렇게 하려 했습니다. 저는 그게 예수님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사실 7년의 싸움과정에서도 많은 죽음이 있었어요. 2017년 9월 조영삼 열사가 서울에서 분신을 했습니다. 또한 함께 싸우던 주민 분들이 결국 한 분 한 분 노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젊은 친구 조현철은 급성폐렴으로 소성리에 묻혔지요. 사실 누구 한 사람의 목숨으로 상황을 돌려놓겠다는 생각은 환상일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결기 없이 어떻게 싸우겠냐며 사무여한(死無餘恨)” 깃발을 들었지만, 우리는 이기는 싸움을 하고 싶은 거지 죽고 싶은 것은 아니잖아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는 말씀을 다시 깨달아야 했습니다.

 

<① 나의 투쟁 방식에 대한 반성>

    투쟁은 즐겁게, 투쟁은 신나게, 투쟁은 질기게, 투쟁은 건강하게! 사드투쟁 초기부터 외치던 구호. 우리가 어떻게 싸워야 이길 것인가? 확실하게 보여주는 구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투쟁이란 것이 즐거운 것도 아니고, 신나는 것도 아닌데, 더구나 잔인한 폭력이 국가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현장에서 어떻게 그렇게 싸울 수 있을까요? 100% 동의하면서도 저는 실천하기 어려웠어요.
    함께 싸우던 강교무님이 늘 이렇게 말했지요. "분노에 잡아먹히지 말자. 분노는 여기에 내려놓고 가자." 그 말에 100% 동의했음에도 저는 여전히 분노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주제넘게 예수님처럼 홀로 십자가를 지려 했습니다. 사드기지는 완성되어 가고 동지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어가는 상황에서, 저는 '나의 죽음을 담보로 하는 싸움'을 상상했어요.

 <압수수색 상황에 내가 있었더라면>

    지난 목요일 압수수색이라는 상황을 만났을 때, 제가 소성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기껏해야 상황실 교무님에게 연락하고는 옥죄어 오는 심장을 달래며 안절부절못했을 겁니다. 또 한번 절벽이나 고압전류가 흐르는 전신주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하는 상상을 하고 그 실행방법까지 고민했을 겁니다. 마침 지나가는 유조차를 막는다고 또 절개지 위로 올라가려 했을 겁니다. 분노만 표현했겠지요?
    그런데 오늘 카톡으로 지켜본 전개는 달랐습니다. 바로 실시간으로 상황이 공유되었습니다. 계엄령이 선포되자 국회앞으로 달려간 사람들처럼 진밭교로 달려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소식을 전하여 기자들이 취재하러 오게도 하고, 성명서도 즉시 발표하고, 압수수색 과정을 녹화하는 사람, 부당한 집행을 감시하는 사람... 모두가 한 마음으로 필요한 일들을 즉시 해냈습니다. 오늘 많은 단위에서 성명서를 발표하며 소성리를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③ 주민들과의 갈등, 나의 실책>

    할머니들이 고령에다 연일 계속되는 아스팔트 투쟁에 골병이 들고 있었습니다. 젊은 연대자들이 싸움을 도맡고 할머니들은 뒤에서 응원만 하시도록 할 수는 없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집을 짓기로 했습니다. 열악한 제 주거환경도 개선하고, 싸우러 오는 연대자들이 쉬고 갈 공간을 만들려 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싸우러 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할머니들을 쉬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 뼈아픈 실책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집을 어떻게 짓고 소성리 투쟁에서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동지들과, 주민들과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혼자만의 생각으로 성급하게 추진한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할머니들을 쉬게 하고 싶다고 했는데, 돌이켜보면 제가 쉬어야 할 사람이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쉬세요. 제가 대신 싸울게요." 라고 말하면서 매일 죽음을 담보로 하는 싸움만 계획하는 제가 어떻게 비쳤을지 이제야 되돌아봅니다. 오히려 "할머니 죽을 때까지 싸우셔야 합니다."라고 강요하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주민들 간에 갈등이 생겼을 때, 중재자로 해야 할 역할을 잘못했습니다. 오해를 키우기만 했습니다. 돌아보니 이런 문제에 대해 제 신앙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고 도로만 지키고 있었어요.  

<④ 사드저지 기독교 현장기도소 책임자로서의 반성>

    예수살기에도 용서를 빌 일이 많습니다. 저는 기도소를 책임지는 활동가로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소성리기도소가 해야 할 역할은 그저 기도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소성리에서 벌어지는 각 사안에 대응하면서, 사드 반대 투쟁에 함께할 기독교인들의 구심점으로, 상황전파, 지속적이며 조직적인 기독교 연대자들의 조직 등에 힘을 기울여야 했을 겁니다. 동지들에게는 이 투쟁이 어떤 점에서 신앙인으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하는지, 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을 전해드려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일들을 완전히 포기하고 지내왔습니다.
    그저 지킴이로서 현장감시활동과 주민들과 끝까지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을 주는 역할에만 만족했습니다.

    제가 그런 역할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극단적인 투쟁만 상상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⑤ 예수님의 투쟁 방식>

    저는 최근에야 "너는 이기는 싸움을 하고 싶은 거냐, 죽고 싶어 죽을 자리 찾아 온거냐?"라는 주님의 꾸짖음을 들었습니다. "숫자에 연연해 하지 말고 네 할일을 하라"는 충고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능력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제게 "그럼 떠나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아직 예수님은 어떻게 싸우셨는지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저보다 더 오래 기도하고 싸워온 분들이 더욱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그 동안 깨달은 예수님의 방식에 대해서만 몇 가지 말씀 드리고자합니다.

*  예수님은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지만 십자가를 피하고 싶어 하셨고, 십자가에 올라야 하는 순간에 제자들을 피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소성리에서 격렬한 싸움이 예상될 때 누군가를 안전지대로 피하도록 했던 일은 당연히 옳은 일입니다. 저도 그렇게 안전지대에서 싸웠습니다. 고맙습니다.

*  예수님은 국가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았습니다.
    퍼포먼스로, 재치있는 문답으로, 말씀으로 무기를 삼았습니다. 지금 화제가 되고 있는 MZ세대들이 보여주고 있고, 사드투쟁에서도 많은 동지들이 그런 재치를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저같은 사람이 문제였지요.

*  예수님은 홀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을 조직했고 파송했습니다. 적절한 역할분담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늘 부족했습니다.

*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경험하게 하는 방법으로 나아가야 할 목표를 보여주셨고, 하늘나라를 경험하는 것이 투쟁의 동력이 되게 하셨습니다.  소성리에서도 우리는 이런 경험을 자주 했다고 생각합니다.

*  예수님은 따르는 이들 사이의 갈등을 각자 안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함으로써 하나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저는 이 일에 실패했습니다.

    저는 "우리는 어떤 세상을 꿈꾸는가?"라는 질문에 막연하게 대답해 왔습니다. 문제라고 생각하는 시스템을 하나하나 고쳐나가다 보면 해결되리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벌써 어떤 구체적인 그림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서로 다른 그림을 가지고 갈등하게 됩니다. 그것을 어떤 갈등이라고 이름붙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대동단결, 통일전선, 어떤 말로 설명해야 할지 모르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투쟁에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도 내부적으로는 많은 갈등을 겪고 있지요. 기껏 힘을 보태겠다고 찾아온 이들이 쫓겨나듯이 대열을 이탈합니다.

    저는 이 일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각자 지지하는 정당, 정파, 이념 등이 달라서 논쟁 끝에 이탈한 분들이 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데 대한 서운함을 표현했다가 아예 소극적인 참여까지 막아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게 이제 "네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더욱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9. 앞으로의 계획과 부탁

저는 이제 소성리에 지은 집을 팔고 서울 가족들에게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사드투쟁에는 지킴이로서가 아니라, 가끔 찾아와 함께하는 연대자의 모습으로 함께하겠습니다.

기독교 현장기도소는 다른 형태로 이미 모습을 바꾸었습니다. 백목사님을 중심으로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며, 평화행동에 결합하고 있습니다.

저는 소성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SNS로 그 소식을 전파하며, 글로써 연대하는데 힘쓰겠습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기도해 주십시오. 애써 지은 집을 팔려고 하니, 처음 지을 때 가졌던 꿈이 깨지고 도리어 사드투쟁을 억압하는 이들의 손에 넘어갈까 걱정입니다. 사드투쟁에 우호적인 분들이 인수하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함께 기도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총 공사비가 3억이 넘게 들었지만, 현실적으로 그 가격에 내어놓을 수 없어서 2억5천에 매물로 내어놓았습니다. 참고하시라고 동영상 링크 하나 남깁니다.

https://youtu.be/4b6Sw0eXQXE?si=L3Y7g3JP_HOW5S8A

남태령에서 보았던 희망이 소성리에서도 꽃을 피우기를 기도하며 이만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