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백/어쩌다 쓰는 일기

[미싱타는 여자들] 감상 후기(호경아 고마워)

도덕쌤 2022. 2. 20. 10:36

36년전 가르쳤던 제자를 다시 만났다.
설 명절연휴를 보내고 소성리로 복귀하던 날 (2월 6일) 갑자기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시작된 만남이었다.
중년의 여인이 되었지만 다시 학창시절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로 돌아가 "그래. 그랬니? 그랬구나..." "선생님은 너네들에게...." 편하게 말을 주고 받았다. 이렇게 편하게 얘기해도 되는 건가 싶었는데,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소속된 단체에서 '감사'라는 직분을 맡고 있어서 총회를 앞두고 한 해 살림을 살펴보러 서울 다녀오는 길에 연락을 했다. 내려오기 전에 서울역에서 얼굴 한 번 보자고.
만사를 제껴두고 달려온 제자와 세 시간을 보냈는데 아직도 나누고 싶은, 또는 듣고 싶은 얘기가 끝나지 않았다.

 

[미싱타는 여자들] 스틸 컷 중에서. (노동교실 단체 사진)

마침 설 명절연휴가 끝난 2월 4일 [미싱타는 여자들]을 보았었다. 1970년대 평화시장 노동교실에서 꿈을 키우던 소녀들이 노동교실을 폐쇄하려는 자본과 국가 권력에 맞서 싸운 그 시절을 돌아보는 다큐였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해야 했던 그 시절. 서울로 올라간 누님도 평화시장에서 미싱을 타면서 80년대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교단에 설 때까지 내 뒷바라지를 해주었기 때문에, [미싱타는 여자들] 이야기가 나에게도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다. 누님은 노동교실을 다니지도 않았고 노동운동도 하지 않았지만(누님은 80년대 검정고시를 거쳐 90년대 목회자가 되고, 지금까지 노숙의 위기에 놓인 여성들을 위한 쉼터를 운영하고 있다), 나는 누님에게 빚진 마음으로 '일하는 여자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전태일 열사가 꿈꾸던 세상을 이 땅에 실현하는 일에 내가 할 수 있는 몫을 해내고 싶었었다.
그러나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을 보면서 떠올렸던 생각들은 누님이나 전태일이나 노동운동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내 또래 여인들이었지만, 그 여인들의 노동교실 시절 사진은 처음 교단에 섰던 장충여중에서 만난 제자들 모습이었다. 10년에서 15년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노동교실과 정규학교의 차이가 있었지만, [미싱타는 여자들]의 주인공들은 초임지에서 만났던 제자들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노동교실 소녀들이 중년의 여인이 되어 그 시절을 회상하듯이, 장충여중 시절을 돌아보며 자신의 지나온 삶의 궤적을 바라보는 제자들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회상 속에서 나는 어떤 선생님으로 기억되고 있을까, 나도 그 시절을 돌아보고 있었다. 
풋내기 총각선생님을 향한 여학생들의 풋사랑을 다독여주지 못했던 미안함이 되살아났다. 아직 어설펐던 나의 수업들이 생각났다. '사랑의 매'를 빙자한 독한 체벌을 빠트릴 순 없지. 끝내 학교밖으로 쫓겨난 아이들도 생각났다. (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몇 년 뒤 참교육을 외치며 평교협 활동을 하고 전교조 운동을 하며 해직에 이르렀지만, 다시 복직하고서도 나는 오랫동안 정말 미숙한 선생이었다. 결국 최소한의 연금이 보장되는 순간을 기다려 도망치듯 교단을 빠져나온 미숙한 선생이었다.
세월호에서 죽어간 아이들이 나를 광장으로 불러내고 지금은 '소성리'라는 광야에 살고 있지만, 나는 지금도 내가 가르쳤던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자주 되돌아 보고 있다.

 

35년전 졸업식에서 영신이와 호경이.
36년만에 만난 호경이가 모자와 장갑을 선물해 주었다.

다행히 36년만에 만난 제자는 그 미숙했던 시절의 내 모습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고 기억해 주고, 오늘 만나고 나서도 '변하지 않은 쌤의 모습'을 보고 즐거웠다고 말해주었다. 
"칭찬받고 싶어서 한 착한 행동은 진짜 착한 행동일까, 나쁜 행동일까?" 어설펐던 시절 던져준 화두(훗날 이 화두는 '인격판단기준', '사람의 등급'으로 바뀌어 갔다)를, 교과서를 덮어둔 수업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장애인과 결혼하고 장애인자립생활센터에서 활동하면서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녀가 자신의 삶의 궤적을 돌아보며 나를 기억하고 다시 보고 싶어했다는 게 고맙다. 
도종환 시인이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 썼던 시에서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말했는데, 흔들리고 또 흔들리는 싸움터에서 꽃을 피워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지금, 가장 미숙했지만 그 만큼 순수했던 시절에 만난 아이들이, 그 아이들이 치열하게 살아온 삶의 흔적들이, 그 아이들이 보내온 뜨거운 시선들이, 나를 곧추 세우고 있다. 
그래 함께 가자! 전태일 열사 꿈꾸던 그 세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