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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무툰에서 대여로만 만화를 보다가 소장하기의 장점을 알게 된 후, 이미 두 번이나 보았던 만화를 다시 찾아 소장하게 된 만화, 강호독보행(江湖獨步行).
명예욕과 지배욕,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얼룩진 역사속에서 이를 신랄하게 비웃어주는 만화를 보며 속이 통쾌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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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인이라는 자리를 귀찮기만 한 자리라고, 거저 주어도 갖지 않겠다는 이군악과, 그러한 평가에 동의하는ㅡ이미 그 자리에 올라 그 아픔(?)을 철저히 체득한 섭소천.
그 둘의 인연은 이군악의 형 이장진이 섭소천을 찾아가 대결을 신청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만화의 첫 장면, "이 시대의 천하제일인은 여자였다."는 말은 남성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반대로 여성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도) 화두를 던지는 대사라고 생각한다. 천하제일인이  여자인지 남자인지가 무슨 문제라고 첫 시작을 이렇게 하는지... 
바로 이장진과 섭소천의 대결 장면이 시작되는데, 섭소천에게 도전하는 이장진에게 섭소천이 하는 말, "명예는 불꽃과 같다"면서 명예를 쫓는 사람들을 불꽃에 몸을 던져 목숨을 사르는 부나비와 같다고 한다. 장진은 사람은 죽어도 이름은 남는다는 말로 응수를 하지. 섭소천은 그래서 이름을 남기기 위해 목숨을 버리러 왔냐고 묻는다. 목숨을 버리러 온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건 승부를 하러 왔다는 장진의 대답은 이제 이 승부에서 이길 확률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하고, 다시 천하제일인의 자격에 대한 논쟁으로 비약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장진은 섭소천이 천하제일인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는데, 그것은 당신이 여자라서가 아니라 악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장진이 섭소천을 악인이라고 말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악행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이 아니라 소문들이었고, 나이가 팔십이 넘은 할머니가 이십대 꽃다운 처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비상식적인 외모ㅡ바로 그 외모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에 대한 장진을 비롯한 세인들의 추측, 흡정대공(이성을 유혹하여 성행위를 하면서 상대의 정기를 흡수하여 젊음을 유지하고 상대는 미이라처럼 말라죽게 하는 사악한 수법)을 쓰고 있다는 추측이었다. 이에 대해 섭소천은 "내 얼굴이 쭈그렁 할머니가 되지 않는 한 그 소문을 변명할 방법은 없겠군. 그래."라고 응수하는데, 장진은 변명을 듣고자 온 것이 아니라 싸우러 왔다는 말로 넘어가며, 비무를 위한 자기 소개와 비무의 조건과 대결방식 등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러나 여기에서 장진이 섭소천과 대결하는 진짜 목적이 드러난다. 장진은 자신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 싸우려는 것도 아니고 섭소천의 악행에 분노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섭소천이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는 인간임을 믿고 한 가지 약속을 받아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장진의 부탁은 동생 이군악을 무공의 길로 이끌어 달라는 것이었다. 무공의 크고 깊은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동생 이군악과 한번 싸워달라는 것이었다.
이군악은 어떤 인간인가? 섭소천에게 동생을 설명하는 장진의 말에 의하면, 섭소천에 의해 장진이 죽어도 정당한 대결에서 죽었으니 복수할 생각을 하지 않을 동생이고, 천하제일인 따위가 돼 봐야 평생 피곤하기만 할 뿐이라고 말하는 놈이 이군악이다. 그래서 내기(섭소천과의 대결에서 장진이 7초를 넘겨 버텨내느냐)에서 섭소천이 지면, 섭소천이 이군악을 찾아가서 도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더구나 군악은 무공도 형편없어서 먼저 섭소천이 그를 무공의 세계로 이끌어 천하제일인에 도전할 만한 재목으로 성장시킨 후에 대결을 청해야 하는 것이다.
섭소천은 장진의 조건을 수락하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자신의 장담대로 7초에 장진을 쓰러트릴 것이라며 곧장 대결에 들어간다. 그리고 칼(칼인지 검인지, 무협지에선 이 구분도 중요한데, 정확히는 모르겠다. 다만 산서쾌의당의 장진이었으니 칼이었을 것.)을 든 장진에게 꽃가지로 응수한 섭소천은 7초를 넘겨 8초만에 장진을 쓰러트린다.
 
이후의 이야기는 자세히 말하지 않겠다. 여기까지 이야기가 제1권(총 20권 중) 55쪽 까지의 진행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후의 이야기는
천하제일인인 섭소천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와
재기발랄하지만 여성편력에만 몰두하던 이군악 ㅡ 산서쾌의당이라는 무가를 쾌의대반점이라는 음식점으로 바꾸고 기루 까지 운영하려는 이군악이 
섭소천을 만나서 '역건곤반음양 혼천괴행마공'이라는 무공과 섭소천의 독문무공이었던 '차경미기현공'을 익히고,
섭소천이 원하는대로 천하제일인의 자리를 이어받기 위해 섭소천을 낙일참이란 무공으로 벤 후,
그로서는 귀찮기만 한 천하제일인으로서의 걸음을 걸으면서,
천하제일가이되 천하제일인이 없던 화엄세가의 음모를 분쇄하고, 
수십 년의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섭소천 그녀를 사랑했음을, 그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절절히 그리워하는 중에,
섭소천과 똑같이 생긴 설지라는 아가씨를 만나는 장면으로 끝나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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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만화를 대략 열 번을 넘게 보고 또 보고 했는데, 그 첫번째 이유는 만화에 등장하는 통쾌한 풍자와 유머였다.
상대방의 말을 폭력적으로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받아서 그렇다면 하고 되받아치는 대사들이 얼마나 재치있고 신랄한지.... 그중에 몇 장면을 여기에 소개한다.

강호독보행 제1권 92-93쪽
강호독보행 제8권 6-7쪽
강호독보행 제8권 10-11쪽
강호독보행 제8권 12-13쪽
강호독보행 제8권 14-15쪽
강호독보행 제9권 86-87쪽
강호독보행 제9권 88-89쪽
강호독보행 제9권 96-97쪽
강호독보행 제9권 98-99쪽
강호독보행 제9권 106-107쪽

 
이 만화는 그 재미만큼이나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박원순 시장이 죽었을 때, 그에 대한 평가가 논란이 되었는데, 그때에도 이 만화에서 섭소천에 대한 세인들의 왜곡된 평가와 그게 가능했던 이유를 떠올리며 나만의 생각에 빠졌던 것같다. 
군악은 섭소천이 차경미기현공 때문에 남자의 정혈을 흡취한다는 소문이 돌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너는 정말 소문을 믿지 않고 나를 믿느냐?"는 섭소천의 말에 "믿고말고 할 것도 없소. 사실이 뻔하니까."라고 대답한다. 여성편력이 화려했던 군악은 섭소천이 남자경험이 없는 여자임을 확신하였다. 
나는 이 시대에 소문을 퍼뜨리는 다양한 미디어들을 믿지 않는다. 이미 빨치산토벌대로 참여했다가 받은 무공훈장들을 장롱속에 썩혀 두고 보훈가족으로서 누릴 수 있는 혜택을 하나도 받지 못하게 한 아버지를 통해, 6.25가 어떤 전쟁인지 교육받은 대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파월장병이었던 큰형님에게 위문편지를 썼던 어린 날과 따이한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학살을 알게 된 오늘날은 같을 수가 없다.
무엇을 근거로 우리는 진실이라 말할 수 있나? 내가 경험한 것은 진실인가? 슈샨보이로 살다 미군 눈에 잘 보여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이가 전하는 한국전쟁과 미군의 이야기가 진실인가? 노근리에서 미군의 기총소사에 죽어간 사람들의 경험이 전하는 한국전쟁과 미군의 이야기가 진실에 가깝지 않을까?
강호독보행이라는 만화는 [강호에 거짓된 소문이 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를 생각하게 한다.
 
만화의 시작은 "이 시대의 천하제일인은 여자였다."는 말로 시작한다. 이 말은 당연히 [페미니즘]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페미니즘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내가 스스로 페미니스트에 가깝다고 느끼면서도, 페미니스트는 성별의 차이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데 모든 문제를 그 차이의 문제로 바라보고 대응하는 사람들이란 생각으로 빠진다. 물론 이 만화는 이미 이런 문제를 핵심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팔십이 넘은 할머니를 (외모가 동년배처럼 느껴지기는 하지만) 반려자로 사랑할 수 있는가?]가 원작에 가까운 화두라고 할 것이다. 
아무튼 나는 이 만화를 읽고나면 그저 얼굴 몇 번 본 사람이지만 '둥글이'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가 소성리에서 고초를 겪고 은둔생활로 돌아가면서 남긴 장문의 글이 생각난다. 그가 보여준 풍자와 패러디가 여성을 모독하는 것으로 오해되고 끝내 사라지게 된 것이 가슴 아프다.
 
무협지를 탐독하면서 어느 작품에서나 일관된 화두지만 강호독보행에서도 가장 강렬했던 화두는 [악을 물리치기 위한 무력은 정당한가?]라는 물음이다. 
이 만화에서 군악은 쾌의당이라는 무림일가를 쾌의대반점으로 바꾸어놓은 인물이다. 무공을 단지 살인 외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인물이다. 그가 익힌 무공은 엽색행각을 하다가 도망치기 위해 필요하다는 이유로 익힌 경공이 전부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화수라는 여자와 나누는 대화에서 그런 이야기를 나눈다. 군악은 화수가 방사에 강한 이유가 무공을 익혔기 때문이 아니냐며 살인 외에도 그런 쓸모가 있다면 무공을 익혀볼 생각이 있다고 한다. 화수는 무공을 익히는 이유는 살인이 아니라 '성정의 수양과 정신의 지고한 경지를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단련하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군악은 "그게 다 헛소리라는 것 알지?" 코웃음치며 "무공이 오직 정신의 지고한 경지를 위한 수련이라면, 왜 강호에서 그토록 치고받고 온갖 아수라혈전장을 만들고 있을까?"라고 묻는다. 그랬던 그가...
섭소천과의 인연으로 천하제일인으로 사람들에게 각인이 되고 천요궁에서 천하 온갖 무공을 일독한 후에 세상을 아수라혈전장으로 만든 독불군을 죽이고 만화에서의 표현으로 강호를 모든 사람의 강호로 되돌려 놓는다. 
지금 이 시대는 미국이라는 나라로 대표되는 전쟁중독국가들에 의해 아수라혈전장이 되어가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중동에서 날마다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진다. 우리나라는 이미 한국전쟁을 겪었고 그 이전에 일본의 식민지 통치도 경험했다. 소성리에 들어온 사드(THAAD)는 남한을 미국의 대리전쟁터로 만들고 그들의 전쟁기지로 완성해가는 고리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수단은 무엇인가? 
여전히 미국을 우리의 수호천사로 착각하는 무리들이, 'UN사'라는 집단이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 패거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무리들이, 일본의 식민 통치를 우리가 근대화된 계기였다고 고마워하는 무리들이 헛소문을 만들어내고 퍼뜨리고, 그들에게 맞서는 사람들을 법이라는 도구로 악마화하고 있다. 우리가 천하제일인으로 만들어주었던 노무현이란 사람도 결국 미국의 요구에 굴복하였고 오히려 악마화되어가는 과정을 견디지 못하여 자살했다 한다(아직도 살해되었다고 믿는 이들도 있지만). 그 뒤에 천하제일인으로 등극했던 문재인이란 사람은 한술 더떠 사드를 완전 뿌리박게 만들었지. 
 
이 답답한 현실속에서 무협지에 빠져서 고독을 달래는 나는 등장인물들 가운데 어떤 인물을 닮고 싶어했는지 모르겠다.
그저 그 신랄한 풍자를 즐기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