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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그 분은 어떤 분이신가?]
1. 이 글을 쓰게 된 사연
저는 나의 신앙고백 중 하나로 이 글을 씁니다. 이 글을 읽은 분들이 제가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해도 좋은지, 제가 기독교인임을 인정해 줄 것인지 판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랫동안 주눅이 들어 있었습니다.
누군가 내 마음 깊은 속을 들여다본다면, 나를 여전히 우호적으로 대할 수 있을까? 염려가 컸습니다.
마음을 감추고 사는데 익숙해졌지요.
하지만 제 얼굴은 너무 유리알 같아서 마음 속 감정은 쉽게 감출 수 없었어요.
마음 깊은 곳에 감춰진 '위험한' 생각들도 뾰죽뾰죽 튀어나오곤 했지요.
중학교 때, 마태복음 10장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는 말씀에 놀라 교회를 떠난 후, 나의 신앙은 혼자만의 철학적인 사색을 통해 성장했습니다. 물론 많은 분들의 글을 읽었지요. 그러나 누군가의 지도나 지속적인 대화 과정은 없었다는 얘기지요.
처음으로 교회에 정착한 곳이 '형제교회'였어요. 그곳은 나 혼자 키워 온 나의 신앙을 용납해 줄 수 있는 곳 같았습니다. 훗날 '평화를만드는교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 교회에서 장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2009년 장로 교육을 받기 시작해서 2011년 장로 안수를 받았는데, 장로 안수를 받을 때 심사를 하는 목사님들 중에 평소 알고 지내던 한 분에게 미리 부탁을 했어요. "나를 장로로 세우고자 한다면, 심사과정에서 내게 이런 질문은 하지 마세요.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내 생각, 주초문제에 대한 내 생각, 동성애에 대한 내 생각은 묻지 마세요."
이런 부탁을 드린 것은 그런 문제들에 대한 제 생각이 스스로 '정통성'을 자랑하는 기독교인들과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제 훗날 성소수자들을 '불쌍히 여긴' 목회자를 교단에서 축출하는 일들이 벌어졌지요. 종교다원주의적인 신념 때문에 변선환 교수를 축출한 사례는 장로안수 받기 훨씬 전에 있었던 일이고요.) 부탁을 들어주신 건지, 장로 안수 과정에서 이런 질문은 없었습니다.
2017년 소성리에 들어가서 '사드 저지 기독교 현장기도소'를 책임지며 7년여의 시간을 보내면서 제 신앙은 더욱 성장(?)했습니다. 이제는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어요. 《"나도 이제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나도 세례받았다.", "나도 예수님을 영접했다." 는 말을 듣게 되면 덜컥 겁이 납니다. 아! 또 한 영혼이 수렁에 빠진 것이 아닐까? 그가 아는 예수는 어떤 분일까? 그가 다니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다른 종교, 같은 신앙 / 새마갈노 소성리편지 08(2020.01.09))
지금은 아내에게 "나는 교회에 나가고 싶지 않아."라고 고백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주눅들어 있었던 제가 이제 더 이상 제 속마음을 감추지 않고 기지개를 켰습니다.
저는 이 글을 통해 나의 신앙을 고백하려 합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제가 여전히 기독교인이라고 인정해 주겠냐고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는 것입니다. 평화를만드는교회 교우들에게는 나를 교회의 교우로 받아들이겠냐는 질문이고, 감리교단에는 내가 여전히 감리교도라고 생각하느냐, 나를 출교시키지 않겠느냐 묻는 것이며, 예수살기 동지들에게도 나를 여전히 같은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 도반으로 인정하시느냐 묻고자 하는 것입니다.
2. "이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아멘"?
예배나 기도회에서 성경말씀을 봉독한 후에 참석자들이 다함께 화답하는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화답하는 순간마다 마음속에 가시가 돋칩니다. "이게 하나님 말씀이라고?"
저는 이 말이 성서무오설의 흔적이라고 여깁니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던 습관이 이렇게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 개역개정) 말씀을 읽고, 우리는 "이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아멘"이라고 화답하지요?
성경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아실 겁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욥의 친구 빌닷(나중에 하느님의 책망을 듣지요)이 하는 말입니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기도하는 욥에게 빌닷이 찾아와 위로하려고 한 말입니다.
성서속의 한 구절, 그것도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 책망 받은 이의 말을 발췌해 읽으면서 "이는 하나님 말씀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기가 차지 않습니까?
저는 기독교의 예식에 들어가는 이 고백문을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성서에 이 말이 기록된 데에는 하느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믿습니다."라든지, "이 말씀 속에 숨은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자 합니다." 정도로 화답하고 싶습니다.
3. '사도신경'이라는 주문을 외우며
사도신경은 기독교인들(천주교인들 까지도)에게 기독교인이라는 그 정체성을 확인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저는 왜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하려 하였고, 나름대로 그 사정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예배 의식 안에서 함께 그 문장들을 주문처럼 따라 외웁니다. 그 문장 안에 담긴 고백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될 날을 기다리며 외웁니다.
그러나 누군가 "너는 하느님이 전능하신 분이라고 믿니?"라고 진지하게 묻는다면, 저는 아직 "아니요. 하느님도 못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날마다 묵상]141002 「미안해하시는 하나님」에서 저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이런 모습을 처음으로 제게 보여주신 것은 바로 오늘의 말씀 <마 5:44>을 붙들고 씨름하던 때였습니다.저는 "하나님! 당신도 못하시는 일이잖아요!" 따지고 대들었지요.그때 불현듯 마음속에 깨달음이 생기는데, 마치 주님이 내게 말을 건다는 느낌이었습니다.(대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네요.)
"형구야, 미안하다. 그래 나도 못하는 일을 하라고 시켰다.
그런데 이 바보야! 생각 좀 해봐라. 왜 내가 그렇게 말했겠니?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나도 못할 일이지만, 내가 네게 하고 싶은 말은 그 '웬수'가 정말 '웬수'냐는 거야!
니가 지금 감정이 상해서, '속'이 상해서, 그놈을 '웬수'라고 생각하지만, 걔도 알고보면 너랑 '형제'라니까!
뭐? 형제랑 싸우게 하러 왔다고 내가 그러지 않았냐고? 형제가 원수가 될 거라고 말하지 않았냐고?
이놈아, 그러니까 그게 그 말이지!"
그날 처음으로 하나님은 제게 "미안해!" 말씀하셨고, "있지~. 비밀인데, 실은 나도 못하는 게 한 가지 있어. 잘못했다고 빌지 않는 놈, 그런 놈은 나도 용서 못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그날 나는 하나님을 용서해 드렸습니다. 내게 "미안해!"라고 말씀하셨으니까요.뭐, 사실 용서고 자시고 할 것 있었겠어요? 하나님 큰 뜻을 제가 몰랐던 게 문제였겠지요.
아무튼 그 후로 종종 저는 미안해하시는 하나님을 뵙습니다.
세월호 가족들을 두고도 하나님이 얼마나 미안하다고 말씀하시는지, "그러니까 제발 니가 더 열심히 하라" 그러시네요.^^
하느님도 못하시는 일이 있다는 제 생각이 잘못되었다 생각하십니까?
사도신경 첫 문장부터 이런 가시가 솟구치니 제가 과연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나의 진정한 스승으로 모시고 살아가려는 저는 제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정체성을 밝히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이해하십니까?
4. '예수- 하나님의 외아들'이라는 고백과 하느님의 유일성에 대한 질문
사도신경을 외우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고 고백할 때마다 또 하나 솟구치는 가시가 있습니다. "나는? 나도 하나님의 자녀라며? 나는 양자인가? 나는 서자인가? 적서차별 하는 거냐?"
하느님의 유일성을 강조하며 기독교(개신교)는 '그분'을 '하나님'으로 호칭합니다. 처음부터 그렇게 부른 게 아니고, 천주교와 갈등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도 당신을 '유일한 참신', 진정 당신과 같은 신은 당신밖에 없으며, 당신만이 진정한 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이 당신을 지칭할 때, 단수형이 아닌 복수형으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당신을 복수형으로 표현하시는 게 당연합니다. 더구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성령으로 임재해 계시는 하느님은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이면서도 수많은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느님은 그만큼 다양한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과 '제게 이런 질문을 하게 하시는 그분'이 같은 분이라는 걸 믿습니까? 그분이, 아브라함의 또 다른 아들 이스마엘과 그 어미 하갈에게 나타나셨던 그분이, 이스마엘의 후손들에게 '알라'라고 불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바벨탑 사건 이후 흩어진 사람들이 그분을 각자 어떤 이름으로 부르고,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저는 그분이 스스로 복수형으로 당신을 표현했다는 것을 생각하며,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우리의 고집스런 표현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저는 기독교인인가요? 대답하시기 전에 다시 한 번 기억해 주십시오. 저는 예수님을 제 스승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5. 이제,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제가 발견한, 제가 느꼈던 하느님을 고백하겠습니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을 겪으며, [날마다 묵상]이라는 이름으로 묵상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위에 인용한 [미안해하시는 하나님]도 그 중 하나지요.
성경 속에서 하느님은 정말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제가 발견한 하느님의 모습에 대한 표현이 다소 거칠고, 무례하고,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디 노여워 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특히 '여호와'라고 불리던 하느님의 모습은 제게 분노를 일으킬 때가 많았습니다.
ⓐ 창조주이신 하느님 - 그러나 창조물을 파괴해 버리기도 하시는 하느님
저는 제가 하느님의 창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도 결국 하느님이 만든 것들이 만들었으니, 그마저도 하느님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처음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더니, 점점 변해가는(타락해 가는) 세상이 보기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그 세상을 파괴하십니다. 다시 만들어 가시지요. "도자기를 빚는 도공이 구워져 나온 도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깨뜨려 버려도 도자기가 무슨 항변을 할 수 있겠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뜬금없는 비유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마치 AI를 등장시키는 공상과학 영화에서처럼, 인간이 인간에게 도전하는 AI를 파괴하려는 모습과 닮지 않았습니까?
ⓑ 사람을 악마(사탄)의 노리개로 던져주시는 하느님
욥기가 이런 모습을 잘 드러내 줍니다.
저는 욥기를 읽으며 처음 1장에서 사탄의 시험으로 죽은 욥의 자녀들을 생각하며 경악했습니다. 1장에서 죽은 자녀들의 삶과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일까요? 그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마지막 42장에서 다시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먼저 죽었던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부활시킨 것은 아니잖습니까?
겨우 40개월을 살고 간 아들을 보내면서, 저는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저 하나 깨우치자고 아들을 데려가셨습니까?"
저는 천안함 안에서 죽어간 군인들과 세월호 안에서 죽어간 사람들, 이태원 골목에서 죽어간 사람들, 곳곳에서 자연스러운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하느님께 묻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또 무슨 시험을 하느라 지켜만 보셨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지옥 같은 세상을 견뎌낼 수 있는지, 그 속에서도 얼마나 당신에게 순종하고 있는지, 사탄에게 증명하고 있는 중입니까?"
ⓒ 고민하시는 하느님
저는 성경 통독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세 번쯤 통독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교회를 떠났던 그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는데, 대한성서공회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다양한 번역과 '성서가 우리에게 오기까지'라는 글을 읽으며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가장 대표적인 하느님 모습으로 각인된 것은 '고민하시는 하느님'이었습니다.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실까요?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의 관리자(청지기)'로 만드셨습니다. 당신의 숨결을 불어넣으며, 당신의 신성을 일부 나누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당신의 신성 중 매우 중요한 선악 판단 능력을 당신이 아직 허락하기 전에 훔쳤습니다. '하느님처럼' 되려고 한 인간이었지요. 이를 괘씸하게 생각한 하느님은 인간을 멀리 쫓아냈습니다.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여전히 인정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은 쫓아낸 인간 때문에 고민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신성을 지녔으면서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신 것 같습니다.
어설픈 능력으로 창조세계를 더럽히는 인간을 고쳐보고자, 물로 심판하시기도 하시고 불벼락도 내려 보시고 하셨습니다.
조금 예뻐 보였던 다윗마저도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자기 부하를 죽음으로 내모는 모습을 보며, 어찌 고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의 성장과정을 직접 경험하신 하느님은 그 예수님의 입을 통해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다시 오마! 그때는 확실히 결정할게! 그때 세상을 심판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자." 말씀하시고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고민하십니다. "지금이 그때인가?"
하느님의 고민은 "청지기로 창조한 인간을 이제 당신과 같은 존재로 받아들일 것인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느님이 예수로 성육신하여 당신을 드러내면서 조건부로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고 부르면서 "성장해라. 아버지를 닮았지만 아직 너희는 아버지만큼 성숙하진 않았잖니? 아버지만큼 성숙하기 바란다."라고 말씀하셨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고민을 정리하시기까지 하느님이 보여주신 모습은 끔찍한 것이었어요.
ⓓ 잔인하신 하느님 여호와 = 전쟁광? 살인마? 광기어린 시험 설계자?
여호수아서를 읽으며, 아니 그전에 출애굽기를 읽으며, 히브리인들을 향한 당신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죽여 버린 인간들을 생각합니다. 이집트의 장자들 중에는 어린 아기들도 당연히 있었을 겁니다. 여리고성에서, 아이성에서 진멸당한 생명들을 생각하며, 저는 눈물을 흘립니다. 다윗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여호와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한쪽 편을 들어 사람들을 죽였습니까? 제게 이러한 명령이 내려진다면 저는 단연코 순종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맘몬과 당신 사이에 이중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당신이 편애하던 사람들까지 처절한 고난을 겪게 하십니다. 맘몬을 섬기는 사람들의 손에 넘기어 고생 좀 해보라는 말씀이었겠지요. 그 과정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식민지 백성으로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았는지 가슴이 아픕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합당한 사람인지 광기어린 시험을 설계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하셨지요. 이러한 시험은 예수님으로 오셔서도 계속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장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왔다."(34절, 새번역)고 말씀하시며 "사람이 자기 아버지와 맞서라고, 딸이 자기 어머니와 맞서라고, 며느리가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라고" 하십니다. 그냥 맞서는 것도 아니고 칼을 들이대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다."(36절, 새번역)라고 극언하십니다. 37절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잔인한 시험이 어디 있습니까? 이처럼 광기어린 시험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중학교 시절 대전 대흥침례교회 안종만 목사로부터 이 말씀을 제 평생의 화두로 받았습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부자의 인연을 끊자는 아버님 말씀에 "교회를 다니지 않겠다"고 아버지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의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얼마나 주눅들어 살았는지 모릅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고도 예수님에게 적합한 제자가 되기 위해 얼마나 고심참담했는지 모릅니다.
세월이 지나 교회를 다니다가, 목사님께 "왜 내게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해 주시지 않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그곳에 가면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게 될지도 모른다"며 한 프로그램을 추천해 주었습니다.
** 잠시 본론을 빠져나와 제 간증을 하겠습니다. **
목사님이 소개해주신 프로그램은 '뜨레스디아스(Tres Dias, TD)'라는 스페인에서 시작된 신자 훈련 코스 중 하나였습니다. 여기에 참여할 때 나의 고민은 "형제교회를 계속 다녀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형제교회를 떠날지, 아예 교회라는 곳을 떠나야 하는지, 하느님이 직접 제게 말씀해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3박4일의 일정이 거의 끝나갈 때까지 아무런 말씀도 듣지 못했습니다. 꿈이라도 좋으니, 환청이라도 좋으니, 세미한 음성으로라도 들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으나 소용없었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마라나타의 시간'이라고 이름을 기억하는데, 그 시간에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라는 인도자의 말을 따라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제 앞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와 있었습니다. 그 순간 속에서 어떤 깨달음이 스쳐 가는데, 마치 하느님이 제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이후 저는 그때 받은 놀라운 충격을 하느님이 제게 직접 말씀하셨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날 하느님의 말씀은 형제교회를 계속 다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아니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겠다며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던 그 기억, 그 아픈 상처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이 글을 쓰며 눈물이 흐르게 하는 하느님의 말씀은 "네가 무릎을 꿇었던 네 아버지가 바로 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이해가 됩니까?
저는 예수님의 시험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은 것입니다. 이삭을 묶어 제단에 놓고 칼을 드는 순간에 아브라함에게 다급하게 하신 말씀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마라! 너는 시험을 통과했다"는 말씀을 저도 들은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저는 "하느님은 제 아버지에게 어떤 이름을 가진 존재로 오셔서, 어떤 가르침을 주셨을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쨌든 마태복음 10장의 말씀은 여전히 너무 잔인한 시험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 다시 확신하게 되는 긍정적인 하느님 모습
저는 차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 애쓰시는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악인들에게도 최대한 인내하며 언젠가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특히 사람들에게 소외당하고 차별당하는 사람들을 향한 하느님의 애정을 보았습니다.
약자를 외면하는 강자들에게 분노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십계명을 주시는 장면에서 하느님은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끊임없이 '과부와 고아, 이방 나그네'를 돌보라고 말씀하시고, 레위기에서는 희년을 가르치시며 노예해방을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린 자,목마른 자, 나그네,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들을 당신과 동일시하는 말씀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이들을 제자로 삼으셨는지 살펴보면 더욱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분노했던 상대가 누구였으며, 가엾게 여긴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확인해보면 너무나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해 "그 나라를 오게 하여 주시며, 그 뜻을 하늘에서 이루심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십시오."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 이 땅, 그 나라는 어떤 모습일까요?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 사회일까요? 어떤 사회적 시스템(제도)을 갖춘 나라일까요?
저는 이 모든 이야기를 요약하여 말하겠습니다.
'진선미'를 추구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창세기 1장, 계속해서 반복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당신만큼 성숙한 신성을 갖추기를 원하신다면 당연히 우리도 진선미를 추구하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생존에만 급급한 존재가 되지 않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진(眞)선(善)미(美)'라는 가치는 상대적인 것입니다. '위(僞)악(惡)추(醜)'라는 개념과 대립하는 것이지요. 그 가치판단기준을 제대로 세워야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겁니다.
하느님은 어떤 판단 기준을 가지고 계시고, 어떤 방법으로 우리에게 그 기준을 가르치고 계실까요? 이것이 저의 화두입니다.
ⓕ 하느님을 오해하게 만든 하느님의 말씀 - 질투하시는 하느님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느님은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출 20:5)라고 직접 말씀하십니다. 질투의 대상은 우상이었습니다. 사람이 지어낸 허상이었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다른 신들은 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있던 신들입니까? 사람이 지어낸 허상이었겠지요? 그런 우상을 두고 질투하는 하느님을 생각해 봅시다. 그럼 당신도 사람들이 지어낸 허상이란 말일까요? 이런 오해가 무신론을 주장하는 철학자들을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란 표현은 우리의 영적 성숙과정에 맞춰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을 전하는 하나의 표현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꾸준히 우리에게 맘몬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맘몬이라는 신적인 존재가 따로 있어서 하시는 말씀일까요? 이미 유일신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이라면 맘몬이라는 신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생존에만 급급한 존재가 되지 말고, 진선미를 추구하는 사람, 하느님만큼 신성이 성숙해진 사람이 되는 일에 몰두하라고 충고하면서, 당시의 사람들 수준에 맞춰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냐, 이것이 저의 깨달음이었습니다.
ⓖ 야비하신 하느님 - 바벨탑 사건
하느님은 청지기 인간이 당신처럼 되고 싶어 하면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민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비극이 바벨탑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사용한 하느님의 수법은 악마들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11장 1절에서 9절까지의 내용을 곱씹어 봅니다.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은 목적은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롯데월드타워가 서울의 랜드마크가 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느님은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고 얘기합니다. (? 여기서 하느님은 '우리'라는 복수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하느님의 걱정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사야서(6:10) 말씀입니다.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 이 얼마나 어이없는 걱정입니까? 이 말씀에 대한 소감을 [날마다 묵상]141007 「하나님의 걱정」이라는 글에서 쏟아낸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글에서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어질 때까지, 사람이 없어서 집마다 빈 집이 될 때까지, 밭마다 모두 황무지가 될 때까지" 그렇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가슴이 아픕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아야 했던 예레미야의 눈물을 흘려야 하나 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날 하느님이 사용하신 수법이 악용되고 있습니다. '지록위마'의 고사처럼 어떤 말을 원래의 의미가 아닌 특별한 다른 의미로 사용하면서, 정적을 골라내는 수법으로도 사용되고요, 같은 단어를 사용하면서 전혀 다른 뜻으로 얘기하며 싸우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반공을 외치는 사람들이 말하는 자유와 국가보안법 폐지를 외치는 사람들이 말하는 자유가 같은 의미입니까? 이념전쟁인 것처럼 위장된 지금 이 시대의 갈등. 그 갈등을 더욱 확대 심화시키는 요소가 바로 이런 언어의 혼란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인류가 타락한 시원이라고 말하는 '이브와 뱀의 대화'에서부터 말이 왜곡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의사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하느님의 야비한 수법은 '이브와 뱀의 대화'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적그리스도의 출현, 맘몬을 섬기면서도, 그 혼합주의 신앙을 하느님의 가르침으로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무리들의 등장에도 이와 같은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저는 청부론을 주창하며 자본주의의 신학적 근거를 마련해준 종교개혁가 칼빈이나, 삼박자 축복을 내세우며 '누리고 있는 부'가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는 척도'가 된다고 가르치는 순복음교회를, 적그리스도의 무리라고 단정합니다. 이들과 함께하는 무리들은 기독교가 아니라 개독교라고 지칭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구원, 그리고 혼합주의 신앙(막 10:17-27)/소성리 아침 묵상(180528)]이라는 글에서도 이런 생각을 드러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제 신앙고백에서 어떤 단어를 트집 잡아 제가 말하려던 본질을 왜곡하지 않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를테면 저는 '화두'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합니다. 시간을 들여 더 깊고 넓게 생각해 나가야 할, 그런 철학적 사색의 단초가 되는 질문들을 저는 화두라고 말합니다. 화두라는 단어는 불교적 색채가 짙은 말이지요. 불교용어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고 공격할 사람들이 있을 거라 쉽게 예상됩니다.
제발 그릇이 아닌 그릇에 담긴 내용물, 언어가 아닌 언어로 표현된 생각의 내용에 귀를 기울여주시기를 간곡히 바랍니다.
6. 고백을 마무리하며
저는 그 동안 하느님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아 왔습니다.
미안해하시는 하느님만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괴로워하시는 하느님도 보았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그 모든 것들이 이미 하느님께서 몸소 실천으로 본을 보여주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악의 무리들이 사용하는 수법들도 하느님이 보여주신 모습이었습니다.
하느님도 감정을 가지신 분이셨고, 복수하고 싶어 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때로는 쉬고 싶어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외로움을 하소연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저는 그 다양한 모습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두 가지를 꼽습니다.
첫째는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겁니다.
로마서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개역개정) 말씀은 사도 바울의 의지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잡은 손을 어떤 상황에서도 놓지 않으신다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내가 하느님만큼 신성이 성숙해진 사람이 되기를 인내로 기다려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3-14 "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개역개정) 이 말씀이 저를 이끌어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1-3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이 말씀이 더욱 깊은 은혜로 깨우침을 주시기를 간구하도록 저를 이끌어 왔습니다.
저는 아울러 간절하게 기도하는 제목이 있습니다.
곳곳에서 생존에만 급급해 할 수밖에 없도록 내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신성을 발견하고 더욱 성숙해지려는 노력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존투쟁이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해고철회를 외치는 투쟁, 쉴 수 있는 일터를 요구하는 투쟁, 안전사회 건설을 요구하는 투쟁, 급박하게 변해가는 환경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환경운동 등등. 우리에게 연대해야 할 많은 투쟁들이 있습니다.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지키자는 싸움도 있지요. 제가 몸담았던 소성리의 사드(THAAD)반대운동도 그러한 싸움의 하나였습니다. 최근 윤석열의 비상계엄으로 촉발된 걱정거리 중에 가장 큰 걱정거리가 그들은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쟁불사를 외치며, 여리고성에서처럼 아이성에서처럼 자신들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자들을 '종북, 좌빨, 빨갱이'라고 몰아세우며 진멸하자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 고백은 여기까지입니다.
제가 여전히 기독교인임을 인정하십니까?
제가 감리교단의 일원으로서 평화를만드는교회의 구성원으로 있어도 되겠습니까?
제가 예수살기의 일원으로 함께 해도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께 하느님의 은혜가 충만하여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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