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속에서/어떤 분의 깨달음을 고마워하며

도법스님의 길위에서 쓴 편지, 혹은 길위의 법문(2914.06.13)

도덕쌤 2017. 2. 14. 06:33

피곤에 쌓인 몸과 영혼을 돌본다는 핑계로 실상사에 들어온지 3주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예수신앙을 가진 이가 어찌 사찰에 들어와 쉬고 새벽예불에 함께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종종 받곤 합니다만, 이름없는 그분께서 어찌 히브리인들에게만 사랑의 가르침을 전했을까?라고 대답하며 석가모니를 통해 전해주신 그분의 가르침을 찾는다고 대답했습니다.
실상사에 들어와 인상적이었던 것은 세월호1000일 기도단이었지요. 매일 거기에서 [세월호 지리산 천일기도문]을 읽고 있습니다. 불교식 기도는 경전처럼 기도문을 작성해서 모든 이가 똑같은 기도문을 낭송하며 삼배를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아래에 소개하는 편지는 실상사의 회주 도법스님께서 세월호 참사 후 길위에서 100일을 보내고 쓰신 편지로 실상사 홈페이지에서 발견한 스님의 법문이랍니다.
우리가 예수를 단지 믿는데 그치지 않고 예수를 살고자 노력하는 그 모습과 스님의 모습이 어찌 그리 닮았는지요. 마치 [부처살기] 창립취지문을 읽는 듯한 마음이었습니다. 글에서 "붓다" 대신 예수를 넣어 읽어보면 어떠실지, 누구든 아직 길에 서 본 일이 없는 목사님께 권해드리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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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서 100일을 보내신 회주 도법스님께서
그 길의 끝에서 쓴 편지입니다. 길위의 법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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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저는 바깥 얘기를 계속해왔어요.
사회 이야기, 겨레 문제 그런데 이 편지는 제게 쓴 편지에요. 사뭇 긴데,
제게 쓴 편지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쓴 편지이기도 합니다.
길 위에서 쓴 편지
벗이여,
내일이면 화쟁코리아 100일 순례가 끝나네.
화쟁 깃발을 들고 역사 골목골목을 걸었네.
그 어느 곳도 눈물 젖지 않은 땅이 없었네.
생명이 안락하고 행복한 한반도 대한민국을 만들고자
온 겨레, 온 국민이 치열하게 몸부림쳐 왔음을 봤네.
걷는 내내 역사 속 붓다를 떠올렸네.
붓다가 오늘 한국 땅에 있다면 무엇을 어떻게 했을까?
알고 보니 붓다는 어느 하루도 절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더군.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마을길을 걸었더군.
피눈물로 삶을 가꾸고 있는 민중 밥을 얻어먹었더군.
식구 끼니를 걱정하는 집에 들어가 밥을 얻어먹고 살았더군.
때로는 저주를 받기도 하고 때론 밥을 얻지 못해 굶기도 했더군.
그런데도 늘 적디적은 소유가치로 생존을 이은 반면
무한한 존재가치로 살았기에 늘 평화롭고 행복한 사람
그이가 붓다더군. 역사 속 붓다, 그이 하루하루는 눈물겨웠네.
역사 속 붓다,
그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네.
그이 하루하루는 나를 부끄럽게 했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살았을까?
무엇이 그렇게 살도록 했을까?
경전에서는 한결같이 생명들을 안락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네.
붓다란 거울에 나를 비추어봤네.
붓다와 닮은 구석이 거의 없더군.
가장 다른 것을 꼽아보니
평소 절을 벗어나지 않고 절 안에만 있었네.
한 번도 굶은 적이 없네.
무시를 당하기는커녕 대접만 받고 살았네.
피눈물로 얼룩진 밥을 먹은 적이 없더군.
생각이나 말이 아니고 실제로
생명들 안락과 행복을 위해 살지 않았네.
오로지 내 편안함, 내 고귀함, 내 깨달음,
내 완성, 내 행복을 위해 살았네.
그런데 문제는
내 삶이 편안하지도, 고귀하지도,
깨달아지지도, 완성되어지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네.
붓다 제자라면 붓다를 닮아야 마땅할 텐데
이름은 불자인데 줄기와 모습은 전혀 달랐네.
어쩌면 붓다와 다른 길을 걸어왔을지도 모르겠네.
붓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내 삶은 왜 붓다와 닮지 않았던 것일까?
유마 힐 말씀이 떠올랐네.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네.
중생이 편안해야 나도 편안하네.
붓다는 늘 연기세계관으로 삶을 바로보고 있었네.
연기 눈으로 보면 그대가 나이고 내가 그대이네.
내가 우주이고 우주나 나이네.
어느 슬픔, 아픔 문제도 내 슬픔, 아픔 문제 아닌 게 없었네.
그러므로 생명 안락과 행복을 위해 헌신하지 않을 수 없었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그래야 하는가?
저를 위해 그이들을 위해 세상을 위해 그래야 했네.
저, 그대, 세상 평화와 행복을 위해 그래야 했네.
그랬기에 붓다 그이는 평화롭고 행복했네.
돌이켜보니 나는 거의 한 번도 온 존재를 바쳐
연기 눈으로 삶을, 세상을 바라보지 못했네.
대부분 내 인생, 내 절, 내 종단, 내 불교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삶을 세상을 바라보고 살았네.
그 결과가 오늘 내 모습이네. 그러니까
말은 불자인데 실제는 붓다가 비판하고
부정한 삶을 살아온 셈이네.
마땅히 붓다와 닮을 턱이 없었네.
순례 길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점에 눈을 뜬 것이네.
늦었지만 다시 붓다를 닮을 수 있도록
발심과 서원을 해 출가를 해야겠네.
이제 남은 세월이 얼마 되지 않네.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는가.
내 남은 여정을 붓다와 닮은 모습으로 살고 싶네.
지극정성을 다해 흉내라도 내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그래야 여한이 덜할 것으로 여겨지네.
다시 출가를 꿈꿔야 하겠네.
진정 붓다와 닮은 제자가 될 수 있도록.
벗이여,
함께 길을 떠났으면 하네.
더 늦기 전에 붓다처럼 당당하게
길 가는 것을 꿈꾸네.
괜찮은 꿈이라고 여겨지는데 어떤가?
잘 지내게.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