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백/소성리 사드저지기독교현장기도소

용서받을 자격(막1:1~8)/소성리 아침묵상180211

도덕쌤 2018. 2. 11. 10:21

 

 

2월 11일 소성리 아침 묵상

용서받을 자격(막1:1~8)

 

◎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막1:4절/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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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성서정과를 벗어나서 말씀을 읽습니다.

당분간은 성서정과를 벗어나 최근에 받은 질문들을 줄기차게 답변해 나가보려는 노력 가운데, 관련되는 성경의 말씀들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가장 먼저 쓰여진 복음서 마가복음 1장의 말씀입니다. 여기에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최근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고 하느님께 용서받았다고 스스로 태평하게 지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함께 나눈 적이 있습니다. '셀프 용서'가 기독교의 용서인가,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느님이 용서하실 수 있는가, 생각해 보았었지요. 그 이야기의 연장선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려는 게 오늘 성서말씀을 선택한 동기였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찌해야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의 문제지요.

실은 2월 7일 아침기도회 시간에 제가 가해자로서의 #MeToo 고백을 했었습니다. 그날 묵상을 다시 정리하여 페북으로 공개하려던 중에 그날 말씀드리지 못한 부분까지 더 생각이 나아가더라고요. 가해자였던 제가 어찌해야 용서받을 수 있을까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누군가 죄인인 저를 용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할 때, 그분은 무엇을 보고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될까 생각해보게 된 것이지요.

물론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려면 먼저 피해자의 입장에서 또는 목격자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야 옳겠지요. 그러나 피해자나 목격자의 입장도 각 사람의 처한 입장이나 사고방식에 따라 너무나 많은 다른 이야기가 가능하더라고요. 사실 어떤 분들은 "난 절대 용서 못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 않겠어요? 내가 아무리 글로, 말로 용서를 빈다 하더라도, 오히려 그분들의 잠들어 있는 분노와 적개심에 불을 붙이는 경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제 회개의 고백이 글로 공개되는 순간에 기껏 잊고 지내던 일들을 다시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일이 될테니까요.

그래서 우선 성경의 말씀부터 찾아 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경우에 죄를 용서를 해 주었을까요?

우선 하느님도 "난 절대 용서 못해!"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생각났습니다. 그런 말씀이 정말 있냐고요? 예 있습니다. 마가복음 3:28~29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개역개정)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욕하는 놈은 가만 안 둬!" 그런 소리지요. 진짜 그렇게 말과 행동이 일치하셨는지는 나중에 따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만 (사실은 하느님도 말과 행동이 항상 일치하는 분은 아니셨어요) 하느님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어떻게 할 때 용서해 주셨을까요?

여기에서 오늘 우리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결론은 간단합니다만 곁길로 조금만 더 나아가겠습니다.

구약에서는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레위기 4장은 속죄제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가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누가 죄를 범했느냐에 따라 제물로 드리는 짐승이 달랐습니만 제물을 바치도록 했습니다. 수송아지, 숫염소, 암염소, 가장 일반적인 제물이 어린 양이나 염소였고요, 능력이 안 되는 사람들에게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두마리, 그마저도 힘이 부치면 밀가루 한 되(2.2리터)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마가복음에서는 구약의 속죄제를 세례로 바꾸고 있지요. 이게 매우 혁명적인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습니다. 속죄제는 제물을 바칠만한 능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사법재판을 두고 비난하는데, 그 시절에도 밀가루 한 되의 제물이 없어서 속죄를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지요. 세례요한은 이러한 현실을 개혁한 것이었습니다. 그저 '회개의 세례'로 속죄제를 대신한 것이지요. 당연히 속죄의 제물로 먹고 살아가던 성전권력, 제사장 그룹에게는 위협적인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민중들에게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겠지요. 그렇게까지 가난하지 않았던 이들도 성전 제사장 그룹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환영할 만한 종교개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세례요한은 더 놀랄만한 얘기를 합니다. 8절 말씀,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회개의 세례가 물로 하는 세례에서 성령의 세례로 바뀔 것이란 말씀입니다. 나보다 더 능력 많은 이가 오시는데 그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답니다.

성령의 세례가 무엇일까요? 적그리스도의 졸개가 되어버린 어느 목사님은 성령의 세례를 받으면 방언을 비롯한 각종 능력을 갖게 된다고 하면서 방언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성령세례의 유력한 증거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방언학교같은 게 생기고, 방언을 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반복하면 혀가 꼬부라질 수밖에 없는 의미없는 말들을 무한반복 연습하는 일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성령께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갈5:22~23a/공동번역)라고 하고 있습니다만, 고린도전서에서는 각사람마다 서로 다른 은사를 주신다면서,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능력, 기적을 행하는 능력, 예언, 영을 분별하는 능력, 방언, 방언의 통역 등등의 다양한 은사를 예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저는 성령의 첫번째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깨닫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회개의 마음이 일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 세례의 첫 징표는 우리에게 회개의 마음이 생기는 일인 것입니다. 무엇이 어떤 계기가 되어 우리에게 회개의 마음이 생긴다면, 우리는 바로 그 순간에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 성령의 세례안에 머물 수 있다면, 마치 농작물이 물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아 자라듯이 성령의 세례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다면, 그 결과 우리는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이 덕을 갖춘 인격자가 되어갈 것입니다. 그 시작이 회개입니다.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나온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스스로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뉘우친 사람들입니다. 구약의 속죄제는 언제 드렸습니까? 레위기 4:13~14 말씀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실수로 범죄하였는데 모두들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거나, 야훼께서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 가운데 어떤 하나라도 어겼을 경우에는, 자기들이 저지른 죄를 깨닫는 대로 곧 모여 큰 짐승 가운데서 수소를 잡아 속죄제물로 바쳐야 한다."(공동번역) 자기 죄를 모르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자기 죄를 깨달았을 때입니다.

하느님도 못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용서해주고 싶어도 용서해 주시지 못합니다. 그리하여 사람을 용서해주고 싶어 안달이 나신 하느님은 친히 우리에게 성령으로 오시어 우리 죄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물로 세례를 베풀지 않으시고 "네가 구원 받았다."거나 "네 죄가 용서받았다."는 선언 한 마디로 물로 베풀던 세례를 대신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자신을 사로잡았던 온갖 더러운 귀신들로부터 해방되었고, 죄의 사슬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뉘우치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시는 그 길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기독교인들의 교리는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교리는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인간을 원천적 죄인으로 생각하면서 구원받을 길은 예수를 믿는 길밖에 없다고 선언하는 기독교인들이라면,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계속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고 포기하고 도리어 죄속에 빠져 있는 걸 당연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바울이 말한 것처럼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이 덕을 갖춘 인격자가 되어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란 이전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이전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길을 따라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난 예수를 믿는다'로 압축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오늘 이야기의 간단한 결론은 이렇습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나 목격자의 입장에서나 하느님의 입장에서나 첫번째 요구사항은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 일입니다.

진정 회개했다고 볼 수 있는가? 네가 용서를 구하고 있는데, 진짜 회개했다고 믿을 수 있을까? 용서를 구하는 이들에게 냉정한 이들은 흔히 용서를 비는 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회개를 증명해보이라고 요구하지요.

그러나 어쩌면 더욱 중요한 일은 자신이 잘못한 줄도 모르고 있던 그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느냐일 것입니다. 그게 잘못이었음을, 그게 죄인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요? 저는 그게 성령의 도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윤동주의 서시를 외우는데, 하늘을 우러를 때, 하느님을 나의 거울로 삼을 때, 나의 부끄러움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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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도 스무명 정도나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내일도 많은 분들이 함께해주기를 기도합니다.

경찰차단선에서의 2부순서의 마무리 멘트도 덧붙입니다.

"사드를 가져다 놓은 저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의 외치는 기도가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는 성령의 도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전쟁이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