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백/소성리 사드저지기독교현장기도소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눅 24:36b-48)(백창욱목사 설교 180415 세월호기억주일)

도덕쌤 2018. 4. 15. 20:24

주일설교문(18. 4. 15) 부활절 세 번째 주일, 세월호 기억 주일

누가 24:36b-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오늘은 부활절 세 번째 주일이며 세월호 기억주일입니다. 부활절은 4월 1일 한 번이 아닙니다. 성령강림절까지 계속해서 부활절입니다. 부활절기 동안에는 주님의 부활을 더욱 기억하며 부활신앙을 간직하고 살아야 합니다. 매일 매일 생활에서 나의 부활체험이 나타나기를 빕니다.

내일은 세월호 참사 4주기입니다. 박근혜정권이 세월호 참사원인을 은폐하려고 온갖 방해공작을 해서, 4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지만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는 진리에 한발자국씩 가까이 가고 있습니다. 그 날 극심한 공포 속에 엄마아빠를 부르며 물속에 잠긴 아이들을 생각하면, 오늘을 사는 게 그리 떳떳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다시 부활시킬 때, 남은 사람도 살아 있는 것을 긍정할 수가 있습니다. 이들을 다시 부활시키는 것은 무엇인가요?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을 명백히 하고, 재발방지를 위한 후속조치들을 취하고 이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여러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할 일은 4월 12일 진밭교 투쟁입니다. 새벽 2시에 시작해서 오후 2시에 끝났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소성리 대첩이라고 명했습니다. 어떻게 이길 수 있었을까요? 대오는 150여명으로 그전 투쟁보다 훨씬 적었습니다. 그러나 한 마음으로 똘똘 뭉쳤습니다.

이번에 깨달은 게 있습니다. 투쟁에서 승리하는 데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모인 사람이 얼마나 단결하고 전술을 잘 짜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술이 빛났습니다. 알루미늄 파이프로 격자를 만들었습니다. 파이프를 자르고 용접해서 70칸 쯤 격자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씩 격자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격자 위에 큰 그물망을 덮고 얼굴만 내밀었습니다. 70여명을 한 몸처럼 묶은 것입니다. 또 일부는 둥그런 쇠파이프에 팔을 넣고 파이프끼리 연결해서 고정시켰습니다.

이렇게 겹겹이 방어장치를 한 이유는 경찰이 진압할 때, 한 사람씩 끄집어내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입니다. 억지로 진압했다가는 큰 부상자가 나오는 옥쇄작전입니다. 격자작전은 앞선 투쟁에서 이것저것 다 해보고 난 후에 택한 전술인데, 결과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두어 시간 진압을 했지만, 격자 밖에 있는 사람을 서너 명 끌어냈을 뿐, 격자 안에 있는 사람은 한 명도 끄집어 내지 못했습니다.

그제서야 경찰도 진압이 힘들다는 것을 판단하고 다시 평화협상에 들어갔습니다. 침탈하기 전 협상 때는 경찰병력을 무기삼아서 그냥 힘으로 밀어붙이겠다는 속셈으로 우리 제안을 다 거부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결사투쟁으로 침탈을 막기로 한 것입니다. 진밭교 투쟁승리 덕분에 이제는 우리가 협상주도권을 가지게 됐습니다.

협상을 마치고 대치했던 경찰이 퇴각하자 모두 만세를 불렀습니다. 몇일 내내 긴장상태였다가 풀리면서 해방감이 몰려왔습니다. 세 번의 전투에서 진 경험이 있기 때문에 투쟁 초기에는 이긴다는 자신감이 별로 없었지만 이기고 나니까 사드를 철회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저는 이번 투쟁을 겪으면서 예수 부활 이전과 이후 제자들의 심정이 이랬구나 하는 비슷한 정서를 느꼈습니다. 4월 초부터 국방부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서 공사를 강행한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제주해군기지 건설이나 송전탑 건설 때처럼 경찰을 상주시켜서 우리를 고착하고 공사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인원도 별로 없는데 침탈을 막다가 경찰에게 끌려 나가고, 또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공사를 마칠 때까지 계속 경찰에게 수모를 당할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예수살기 영성수련회가 끝나는 날인 11일 수요일 마지막 순서가 진밭교 현장기도회였습니다. 기도회 설교를 했는데, 무거운 마음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자들을 덮친 두려움이 우리에게도 있다. 당장 내일 새벽 정권의 침탈에 심난하다. 공권력과 충돌할 때, 심신의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분쟁현장에서는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집회와 시위 권리는 공염불이다. 시민을 보호해야 하는 경찰의 의무는 ‘개나 줘버려’가 됐다. 오직 공권력의 폭력만이 난무한다.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우리 주님은 죽음을 이기신 분이다. 우리는 그 진리를 담지하였다. 부활신앙의 증거는 평화를 구하는 일이다. 부활은 평화로 구체화하고 실현되어야 한다. 평화는 폭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둠을 물리치는 기운이다. 이 기운으로 사드를 물리치자”고 했습니다. 이 설교대로 처음에는 폭력에 맞서는 일 때문에 심난했지만 투쟁으로 막아내니, 부활기운으로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누가복음의 부활증언입니다. 복음서마다 부활증언이 다르고 다른 이유는 각각의 공동체의 사정을 반영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의 부활증언에도 다른 복음서 부활증언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47. 48절을 보겠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하였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24:46.47) 이 말씀과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주님과 마지막 상봉을 하고 부활증인 사명을 부여받는 장소가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다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 여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 열한 제자가 갈릴리로 가서, 예수께서 일러주신 산에 이르렀다.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마태 28:10, 16,17) 마태는 주님과 이별하고 제자 삼으라는 명을 받는 장소가 갈릴리입니다. 예수와 제자상봉의 마지막 장소가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이고 마태복음은 갈릴리입니다. 서로 충돌합니다.

이를 볼 때, 부활증언에서 마지막 상봉장소로 나오는 예루살렘이나 갈릴리라는 장소도 예수 때를 말하기보다는 후대 예수 공동체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공동체는 예수 부활을 증언하는 하나님나라 운동을 갈릴리에서 시작하였고, 누가공동체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환난의 시대에 증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요? 증인될 사람이 그들뿐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이는 없습니다. 목숨과 바꾸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누가공동체 제자들을 증인으로 세운 부활체험은 무엇인가요? 무엇이든 그 부활체험은 강력해야 합니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그들만의 것이어야 합니다. 그들은 두 가지 체험을 했습니다.

첫째 체험은 유령논쟁입니다. 유령논쟁은 누가복음 부활증언에만 있습니다. 즉 그들만이 겪은 체험입니다. 제자들은 갑자기 나타난 예수를 보고 놀라고 무서워했습니다.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당황하는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만지게 합니다.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당신이 살아 있는 몸임을 강력히 입증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너무나 기뻐서 긴가민가하며 놀라워했습니다. 가장 강력한 증언은 본인이 직접 겪은 것입니다. 누구한테 들은 것으로는 약합니다. 직접 겪은 일은 관념으로 아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식이고, 체험입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몸을 직접 확인했습니다.

두 번째 체험은 음식을 먹은 일입니다. 예수는 그들 앞에서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먹었습니다. 음식을 먹는 일은 산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유령은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그런데 제가 주목한 것은 음식 메뉴입니다. 구운 물고기 한 토막. 부활주님께 드리는 메뉴치고는 너무도 소박합니다. 이 소박한 메뉴는 무엇을 말하나요? 그들이 인색해서는 아닐 겁니다. 그들이 처한 환경이 음식을 제대로 갖춘 성찬을 즐길 수 있는 조건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어떤 환경이기에 스승 예수님께, 그것도 죽음을 이기신 주님께 고작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는 것인가요? 그들이 너무 가난해서 먹을 게 없든지, 아니면 어떤 상황을 맞이하여 매우 긴박하고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임시변통으로 먹어야 하는 환경입니다.

왜 그렇게 말하나요? 진밭교 투쟁에서 그랬습니다. 새벽 3시경부터 격자에 들어가고 진압에 맞설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언제 진압이 들어올지 모르니 식사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물도 마실 수 없습니다. 물을 마시면 소변이 마려운데, 격자 안에 고정돼 있어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이 아닌지라 모두 참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오전 열한 시경, 경찰이 진압을 시작했습니다. 밀리면 끝장인지라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두어 시간 싸우고 나서 소강상태에 들어갔습니다. 그 때 옆에 할매가 비닐에 싼 떡 한 조각을 주셨습니다. 구운 물고기 한 토막도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어떤 배경이든 간에 제자들에게는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이 가장 최선이었습니다. 또한 예수의 후대 제자들도 녹록치 않은 상황에서 예수부활사건을 맞이했다는 암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로마권력의 폭력에 굴하지 않고 죽음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소식을 받은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예수의 길을 따르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대 제자들도 자신들의 상황을 이기고 부활증인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들만이 겪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증인의 길은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이 상징하듯이 참으로 소박하고 때로는 보잘 것 없습니다.

우리도 예수살기를 표방합니다. 예수살기는 한국교회 신앙세태에서는 외로운 자리입니다. 주류신앙이 가는 길과 다르고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받아서 제자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께서 제자들의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신을 일치시켰습니다. 제자들과 기쁘게 동행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오늘 여기에 우리와도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내 삶의 자리에서 내가 겪은 부활을 증언하면 됩니다. 기쁘게 증인의 자리에 서십시오. 보고 겪은 것만 말하는 성실한 증인이 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