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고백/어쩌다 쓰는 일기

시드니에서 보내 온 선물

도덕쌤 2021. 4. 5. 10:16

장충여중,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발령받은 첫 학교.
부임한 지 석달도 안 되어 입대하고, 제대하자마자 복직하여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졸업성적도 전교 꼴찌, F학점을 두 개나 그대로 둔 채 졸업했던 제가 교사로서 갖춰야 할 자질을 얼마나 갖추고 있었겠습니까? 그저 대학에 갓 입학할 때 지녔던 열정 하나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보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나?'에만 몰두하며, 주어진 도덕교과서의 내용을 답답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입대하기 전, 그 짧은 석달 동안, 총각선생에게 구애를 하며 돌진해 오던 여학생들에게 받은 충격이 트라우마가 되어, 복직하고서도 사춘기 여학생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많이 힘들었던 시기였지요.
오로지 '사랑의 매'가 가진 힘에 의지하여 수업과 교외지도라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절, 2학기를 시작하며 처음 만났던 그 아이들이, 바로 그전까지 가르치던 선생님을 몰아내고 대신 그 자리에 섰으니 제게 미운 털을 박았어도 괜찮았을텐데, 제가 내준 숙제를 지금까지 기억하고, 제가 당시에 가르쳐주었던 노래들을 기억하며, 그때부터 강형구 선생님을 존경해 왔다고 고백해 온 제자가 있었습니다.
존경이든, 흠모의 정이든, 제게 애정을 표현하며 다가오는 아이들에게 철저히 거리두기를 하고 있었던 터라, 그런 제자가 있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요.
전교조 투쟁으로 해직된 후 민중후보로 서울시의원에 출마했을 때, 선거운동본부 사무실에서 고3이 된 제자를 만나 처음 그 고백을 들었습니다. 
이후 그 제자는 진보정치운동을 하는 청년단체의 일원이 되었고, 진보정치를 꿈꾸는 다양한 정파들의 갈등-이합집산을 경험하며 마음에 상처를 입었었던 듯합니다. 환경운동단체의 일원이 되어 장차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겠다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새만금방조제를 막기 위한 싸움이 패배하면서 결국 좌절하고 호주로 건너갔답니다.

저는 한강중을 마지막으로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소홀했던 저를 반성하며 교직을 떠났습니다. 세월호 사건으로 다시 광장에 나오면서, 과거에 혹독한 매질로 상처를 주었던 아이들을 찾아 사죄를 하고 싶었고, 나의 꿈을 이어받아 고통스런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된 제자들을 찾아 그 길에서 받은 상처들을 보듬어 주고 싶었습니다. 노력이 부족했던 탓에 그 제자들을 찾아내기 어려웠지만, 드디어 한 친구가 연결되었는데, 그 친구가 호주의 제자였습니다.
지난 해 여름 "혹시 내가 아는 그 향림인가 궁금해서"라고 간단한 메시지를 페메에 남겼는데, 페절을 하고 지내던 제자가 지난 3월 15일 "선생님...ㅠㅠ 울 선생님 맞으시네요. 저 그 향림이 맞죠."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그후 지난 20일 동안 거의 매일 문자로, 보이스톡으로, 페이스톡으로, 길게는 몇 시간씩 통화를 하면서, 글을 주고 받으며,  30년의 공백을 메워왔습니다. 
아무리 스승과 제자 사이라지만 그렇게 긴 대화가 가능한거야? 
스스로 썸을 타고 있는 건 아닐까 자문할 정도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랑은 시간낭비"라는 인도영화 [PK, 별에서 온 얼간이]의 노래가 떠올랐지요.
지금 하루에 가장 많은 시간을 향림이와 나누는 대화에 쓰고 있으니, 지금 누가 내게 묻는다면 "지금 내가 가장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향림이야!"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겁니다. 자구가 지구에 남아 북콘서트에서 되새겨보는 PK와의 사랑.
어쨌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한숨쉬던 예수님처럼, 우이독경과 같은 수업 ㅡ 바위벽에 대고 하는 수업에 절망했던 제게는, 요즘같이 행복한 날들이 없었습니다. 
이제 귀를 쫑긋 세우고 제 60 평생 깨달음에 반응해주는 제자가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이 친구가 제 얘기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그대로 믿어주는 맹신자는 아니랍니다. 
과거 교직에 있던 시절 사이버교실로 운영했던 제 블로그를 찾아  [알면서 왜 ~? (체벌의 이유)]란 카테고리의 글을 읽고난 뒤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며 비판하더라구요. 학창시절 자신은 제게 매맞아 본 적이 없었지만, 쌤이 매를 들고 친구들에게 걸어갈 때 마음이 좋지 않았답니다.)
이 훌륭한 친구를 다시 제자로 맞은 기쁨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시드니 웨스트라이드에서 장애우들을 돌보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친구가 선물을 보내왔습니다.
소성리 사드철회투쟁을 지지하며 응원의 글을 보내왔습니다.
그림과 함께 간식거리도 보내왔어요. 난로가에 모이는 소성리 할매들과 지킴이 동지들과 간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여기에 편지글과 그림, 자신을 소개하는 사진을 소개합니다.
멀리서 우리의 투쟁을 응원하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오늘도 힘을 냅니다. 
내가 오늘 헤치고 나아가는 가시덤불이 곧 뒤를 이어오는 세대들에겐 길이 될 것을 믿습니다. 
화이통(和而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