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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하반기 예수살기 성서학당]"예수; 先生으로 만나다" ㅡ 네번째 시간, 한인철교수의 세번째 강의

도덕쌤 2016. 11. 19. 11:52

오늘의 강의는 5장부터 7장까지 두시간에 소화하기는 무리한 분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의 말씀처럼 조교가 워낙 정성들여 꼼꼼하게 이해하기 쉽게 강의내용을 잘 정리해 만든 PPT자료 덕분에 시의적절한 비유와 유머까지 섞인 명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시간관계상 7장의 마지막 몇 부분은 책을 읽어보면 다 알수 있는 내용이라며 빠른 속도로 사진찍을 틈도 없이 넘어가긴 했지만....)

오늘도 강의 내용 요약은 PPT자료로 대신한다. (다만 약간의 보충정리가 필요하다싶은 곳은 따라가며 덧붙이기로 한다. 괄호 속에 넣은 이야기는 강의내용이 아니라 기자인 본인의 생각들임을 밝혀둔다.)

(총3장의 강의를 담다보니 사진자료가 50장이나 되어 사진만 보아넘기기도 사실 벅차지 않겠나싶다.)



제5장  예수의 동시대인 읽기 - 함께 아파함과 냉혹한 비판

5장의 질문은 예수는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 분이라고들 하는데 과연 예수는 당대의 모든 이들을 보편적으로 무조건적으로사랑하셨을까? 라는 것이었다. 질문에 대답의 방향이 엿보이는 것처럼 당연히 그 대답은 "아니오!"
예수는 당대의 어떤 이들에게는 함께 아파하는(compassion) 마음을 보여주셨지만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냉혹한 비판을 가하셨다.

(이러한 예수의 편파성은 냉혹한 비판을 받은 그룹에게 살의를 느끼게 만들었을 것이고, 그것이 십자가와 부활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예수시대의 이스라엘에는 여러가지 차별의 기준이 있었다.


이러한 차별은 세가지 사회체제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예수는 이러한 차별에 대해서 '차별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함께 아파하는 마음을 보여주셨고

(여성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에 대해서 누가복음 11:27-28에 대한 해설이 마음에 남는다. 여성의 역할을 애 잘낳아 기르는 것, 부엌살림 잘하는 것으로 한정하고 있는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예수님은 여성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하나님나라 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구하고 계셨다.)


'차별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냉혹한 비판을 가하셨다.

예수님이 종교지도자들에게 퍼부어댄 과격한 표현들을 설명하면서, '독사의 자식'이란 표현은 '개새끼'보다 심한 욕이 아니냐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옳은 이야기이긴 하지만 싸가지 없게 말하고 있지 않느냐고, 유시민처럼 말하셨다고^^

(나의 성경이해를 반성해보면, 예수님의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은 머리에 깊이 박혀 있지만, 정치지도자나 로마제국에 대한 비판은 그리 쉽게 눈에 띄는 것은 아니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정치와 분리된 교회를 강조하며 의도적으로 예수의 정치적인 모습을 탈색해 온 한국의 보수신앙과 로마제국의 탄압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로마제국과 관련된 예수의 저항은 난해하게 숨겨두어야 했던 초기 기독교 상황 때문이었을까?)



제6장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 - 일벌백계(一罰百戒)

6장의 질문은 예수는 왜 십자가형을 받게 되었을까?라는 것이다. 


예수는 성전에서 난동 ㅡ 이를 우리는 '성전정화사건'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사실상 그것은 난동이었다. ㅡ 을 저질렀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지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위험인물로 찍혀 있었다. 예수가 해 온 일은 요즘 우리사회의 표현으로 하자면 불법집회였고, 체제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는 불순한 사상이었던 것이다.

예수의 죄목은 '유대인의 왕'이었으며, 심문당한 내용은 "네가 자칭 '메시아'냐, '유대인의 왕'이냐?"는 것이었다. 당시 유대사회의 메시아 개념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 메시아와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에게 '메시아'란 '외세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전쟁영웅'으로서 결국 '외세를 몰아내고 독립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이었다. 이미 예수시대에 자칭 메시아라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만란의 지도자들로 스스로를 왕이라고 하였다.

누가복음 23:2 예수를 빌라도에게 고발한 이들은 예수의 죄를 세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황제에게 세금낼 것을 반대했다는 죄목이 선뜻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누가복음 20:25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말씀에 대한 해석이 어렵기 때문이다. 다음은 이에 대한 학자들의 대답이다. 

(예수의 죄목이 세가지였다는 것을 오늘에야 분명히 깨달았다. 성경을 그동안에 얼마나 건성건성 읽고 있었는지 깨닫는 기회가 더욱 많아지고 있다.)

예수의 심판에서 빌라도의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복음서의 기록은 빌라도가 예수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때문에 한때 기독교사회에서는 빌라도가 천국에서 집사의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복음서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에서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역사적 빌라도는 복음서의 기록과 다른 무자비한 사람이었다. 복음서의 기록은 극심한 탄압을 받던 초기 기독교가 선교적 생존을 위해 선택한 왜곡이 아니었을까? 그 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자리잡아가는 과정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고 사실을 사실대로 고백한 것이 사도신경의 고백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쨌든 복음서가 예수의 십자가처형의 책임을 당시의 유대인에게로 돌리면서 이것이 반유대주의의 온상이 되고 말았다.

예수에게 주어진 형벌은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다. 그 형벌은 일벌백계로 다스리고자 하는 범죄에 대해 주어지는 형벌이었다.

예수는 그 가운데 반역죄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예수는 그렇게 죽게 될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 이들이 기대한 것은 일벌백계!




제7장  다시 살아난 예수 -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7장의 질문은 예수의 부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정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났냐는 것이다.

성경은 '월하의 공동묘지'와 같은 방식의 부활이야기, 시체가 다시 살아났다는, 그런 부활을 얘기하고 있는 것인가?

(사실 많은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그런 부활을 믿는 것같다. 누가복음 20:27~40 사두개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의 고백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으며"는 많은 혼란을 느끼게 한다. 교수님은 <누가 부활한 것인가? 어떻게 부활을 확인할 수 있었는가?> 질문을 던지며, 예수 부활의 실제적인 의미를 되새겨주었다. 교통사고로 온몸이 절단된 시체가 다시 살아난다면, 100세 노인이 기력이 다해 죽었는데 그 시체가 다시 살아난다면, 성폭행범죄자가 다시 살아났다면...??)


먼저 부활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었는지부터 살펴보자.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극심한 유대교박해로부터 부활사상이 유대교에 도입되었다.

다니엘서의 부활이란 그러므로 심판의 날에 이루어질 부활이었다. 부활에 대한 생각이 없던 신명기의 역사관 '삼박자 축복'은 죽음 이후 심판의 날로 연기되어 부활의 그날에 받게 될 축복으로 변질되었다. 율법(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면 삼박자 축복을 받는다고 했으나 현실에서는 율법을 따르는 것이 죽음과 고난이 예약되어 있었던 BC2세기의 이스라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고난당하던 사람들이었고, 부활은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심판의 날이 달갑지 않은 기득권세력이었다.


그러나 부활의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어쩌면 헤롯 안티파스였을 것이다. 

부활한 예수를 만난 이들은 만나자마자 예수임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가 살았을 때 예수가 해 왔던 일을 누군가 거리낌 없이 다시 해나가는 모습을 보고 다시 살아난 예수임을 깨달았다.

예수부활의 현장은 예수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그곳이었다.

예수를 따라 예수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없다면, 예수의 부활은 이제 없는 것이며,

그때는 기독교라는 종교만이 아니라 참인간, 참세상을 꿈꾸는 이들도 더 이상 없게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며,

세상이 끝났음을 뜻하는 것일 게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제자들의 선언은 십자가 처형의 공포를 딛고 우리도 예수와 같은 길을 가겠다는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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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기독교의 전통적인 부활이해에 상당히 도전적인 이야기였기에, 강의가 끝난 뒤 질의응답 시간은 시간이 부족한 게 아쉬웠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나서 죽음을 각오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 것인지, 죽음을 각오하고 옳은 길을 가기로 한 결정이 예수를 부활하게 한 것인지 질문이 있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실천하느냐, 하나님 나라 운동을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느냐 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봤느냐가 사도의 권위를 뒷받침하게 되었을 때, 예수와 같은 현장에 서 보지 못했던 다소 사람 바울은 결국 자신의 고백 외에는 누구도 증거해줄 수 없는 이야기로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확보한다. "니네만 주님을 만났냐? 나도 만났다!"

나는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고, 월하의 공동묘지 이야기같이 시체가 다시 살아났다고, 그렇게 다시 살아난 예수를 만났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직접 만나지도 않았으면서 예수의 부활을 알게된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질문의 방향을 바꿔 생각해보았다.

예수의 부활에 신경이 곤두설 사람들이 예수가 정말 부활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열강을 해주시는 강사님이 다과까지 준비해주시고, 뒷풀이도 책임져주시고, 교수님의 기대가 무엇인지 뜨겁게 다가왔다.

이날은 가재울녹색교회 오정순교우님이 떡까지 준비해주셔서 넘치는 사랑을 만끽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