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한충원 목사가 노벨상 수상 작가인 한강에게 보낸 공개편지를 읽었다. 그의 아내 민에스더 사모가 '내 남편 한충원 목사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에게'라는 제목으로 쓴 글을 우연히 읽고, 그들에게 나의 글을 한 번 읽어보라고 했는데, 예의상 한목사의 공개편지를 나도 읽어보아야 하지는 않겠냐는 생각에 그 전문을 옮겨 놓은 블로그를 찾아서 읽어 본 것이었다.그의 편지를 읽고난 소감은 그가 과연 나의 글을 읽고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볼 여지가 있겠냐는 절망적인 것이었다. 이미 그는 우리가 흔히 '꼴통'이라 부르는 보수우익의 광신도가 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가 그렇게 보수 꼴통들의 세계로 들어가 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그는 편지에서 30세에 상처받은 영혼을 치료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며칠 전에 말을 타고 산길을 달리던 이들을 만난 뒤에 그들이 달리던 산길을 걸어보고 싶어 길을 나섰다. 알고보니 그 길은 금산군이 조성중인 금산둘레길의 일부였고 7구간 (마전시장에서 수영마을까지) 대략 15km 중에 목소임도, 약 4km 되는 길이었다.중부대학교에서 태조태실로 올라가 만인산 정상 못미쳐서 목소임도 방향으로 내려오면 민족자주통일비가 있는데, 민족자주통일비는 「 통일어머니의 설풍행려」라는 구술자서전을 남기신 정효순님이 사재를 털어 세운 비석이다.통일비로 가는 길은 태조태실 쪽에서 둘레길을 따라가는 것보다 중부대학교를 가로질러 오르는 편이 더 편하고 쉬운데, 중부대학교 건원관과 범농관 사이에 안내표지가 서 있다. 이곳이 오늘 건강산책의 시작점이다. 건농관 옆을 따라 올라가는 길. 사진은 내려..
한충원 목사, 그리고 민에스더 사모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안종만 목사가 시무하던 대흥침례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전직 도덕교사입니다. 중2때 담임 조용현 선생님이 그 신앙의 길로 인도했었지요. 선생님 댁에서 과외공부한다고 핑계대고 중2 가을과 겨울, 성경공부를 하고, 「한국기독교100년사」라는 두꺼운 책을 제5권 중간쯤까지 독파했던 그 때를 성장과정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라고 추억하고 있습니다. 그랬던 제가 조용현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안종만 담임목사님께 기도를 받고 다음 주일 예배에 참석한 후 교회를 떠났습니다. 겨울이 끝나가던 그 때, 엄니에게 교회를 다니지 말라고 뭇매를 맞고 맨발로 교회로 도망쳤다가 선생님댁으로 도망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리고 안목사님이 제게 주셨던 ..
강원도 홍천에서 양수발전소 반대, 송전탑 건설 반대 투쟁을 하고 있는 박성율 목사님이 단체톡방에 올린 글이다. 이 분은 오래도록 골프장 건설 반대, 설악산 케이블카 반대 등등, 환경을 지키고 민중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는 싸움을 해오면서, 한편으로는 철거현장의 싸움, 농민운동, 민주화 운동에 함께 연대해 온 투사다.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은해염이라는 소금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며 고향땅에서 목회를 해 왔다. 나처럼 심근경색으로 관상동맥에 스텐트를 몇 개씩 삽입한 환우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싸웠고, 아직도 싸운다. 내 삶의 확신은 예수고, 예수의 삶이 나의 삶이기 때문이다 옳은 것이기에 이길 것이다. 힘이 없기에 이길 것이다. 새로운 역사로 가는 것이기에 이길 것이다. 신음속에 절규하고 빼앗기고 쫓겨..
눈 앞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목격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너무나 끔직해서 우리의 뇌는 그 기억을 삭제하려 애쓴다. 뇌수가 터져나간 모습으로 죽은 친구, 그 사건의 기억이 사라진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죽음도 있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어가던 모습. 백혈병 진단을 받고 항암제를 혈관주사로 받아들이던 아들은 약 4개월만에 죽음에 이르렀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아들은 주사바늘을 뽑아내려 했고, 주사바늘이 꽂힌 주변은 검붉게 괴사해 가는 중이었다. 그 녀석에게 의사가 시키는 대로 순종할 것을 강요했던 내 모습을 뒤늦게 후회하고 있다. "그러면 오줌 쌀 거야!"라고 반항하며 환자복을 오줌으로 흥건히 적셔대던 아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내는 임신중이었다. 아들의 병간호와 출산..
그제는 어린 시절, 그러니까 반세기 전의 추억을 돌아보는 여행을 하고 어제 사진과 글을 남겼다.그러다 보니 지금까지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사건들 가운데 가장 어린 날의 사건이 자연스레 떠올랐다.가끔은 누군가와 상담하는 과정에서 고백한 이야기이고 형제들은 너무나 잘 아는 사건인데, 그 이야기를 [사진으로 엮는 자서전]이란 카테고리에 글로 남겨야 하겠지만, 차마 그 이야기는 글로 쓰지 못하여 더 이상 진도를 나가지 못했다.왜 나는 그 이야기를 글로 남기지 못하는가?뼈를 묻겠다고 집까지 새로 지어가며 머물고자 했던 마을을 떠나면서, 그에 관한 일들이나 나의 입장을 명백하게 설명하고 싶었지만, 관련되어 떠오른 나의 감상이나 추상적인 화두들만 늘어놓고 있었던 것도 비슷한 경우이다.왜 나는 글을 쓰지 못하는가..
큰누님이 감을 수확해달라 해서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 보문산 자락 대사동 옛날 살던 동네를 들렀다.보문산에서 내려오던 개천은 복개하여 도로가 되어버린 지 오래.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식당이 들어서 있었다.일단 차를 주차할만한 곳을 찾았는데, 옛날 제일인쇄소로 기억되는 넓은 집터가 주차장으로 바뀌어 있었다.차 한 대가 통행할 만한 도로가 입구에서부터 옛날 대연각이라 불리던 당시 신흥주택가까지 직선을 뚫려 있는데, 옛날 우리집 앞집이었던 목선생네와 뒷집 남씨네 땅을 통과하여 제일인쇄소와 목선생네의 골목은 옛모습을 잃고 있었다.정원마당을 도로로 빼앗긴 옛날 우리집 앞집 목선생네집은 담장이 건물쪽으로 당겨져 있고뒷집 남씨네도 마당을 비스듬히 빼앗겨 'ㄱ'자로 막혔있던 골목이 시원스레 길로 뚫려 있었다. ..
아침부터 가슴이 답답하니 명치를 얻어맞은 듯한 통증이 시작되었다.가슴을 두드리며 심호흡도 해보고 다시 누워 호흡속도를 빠르게 느리게 변화도 줘보고...금산에 내려와서 416걷기 챌린지를 신청했는데 우울증이 심해지면서 외출을 하지 않고 지내다보니 그 동안 운동량이 지나치게 적었던 것같다. 그래서 혈액순환에 문제가 생겼을 듯.모처럼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점심을 먹고 바로 출발했다.만인산 태조 이성계 태실까지만 다녀올까 하고 걸었는데, 발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얼마나 시원한지 천천히 더 걸어보고 싶었다. 절정에 달한 단풍에 토요일이라서 만인산 휴양림을 찾은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산책을 즐기는 사람들을 피해 목소임도방향으로 걸었다. 민족자주통일비를 거쳐 중부대학교를 통과하여 돌아오는 코스를 택한 것.목소임도로..
눈 앞에서 누군가가 죽어가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이 매우 드문 일이 된 세상을 살고 있다. 함께 살 맞대고 살아가던 가족들마저 사망 선고가 내려지고 나서 주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차디찬 시신으로 만나는 정도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나보다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다. 1920년생이셨던 아버님은 식민지 시절 지원병이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남태평양으로 향하다가 오끼나와 근처 어디쯤에서 배가 침몰당하는 일을 겪고 바다위에서 수십 시간을 떠돌아야 했다고 한다. 일본이 패망한 후 돌아와 경찰이 된 아버님은 빨치산 토벌대로 차출되어 남원 어디쯤 지리산 자락에서 전투를 치렀다고 한다. 바로 옆에서 철모에 구멍이 뚫린 채 죽어가던 동료를 추억하며 당신이 지금까지 살고 있는 건 기적이라고 말씀하셨었다. 역사를 돌아..
나의 기억이 왜곡되어 있거나 허구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뒤 이런저런 사실 관계를 조사하고 그에 대해 설명하느라 정작 하고픈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대화가 중단되는 경험을 자주 한다. 누군가가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처음 보았던 기억에 대해서 얘기해 보려고 하는데, 막상 얘기를 꺼내려고 하니 또 이러한 결말로 치닫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 트럭에 부딪쳐 나가떨어졌던 친구. 그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니 친구라고 부르는 것도 어색하다. 당시 같은 학교를 다녔던 것과 함께 놀았던 기억이 없을 만큼 상당히 떨어진 윗동네에 살았다고 기억한다. 그 사고가 언제 벌어졌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학교 가는 길이었고 아직 그 길 주변이 황량했던(개발이 진행되지 않았던) 시절이란 것 뿐, 계절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