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수없이 떠오르는 물음표들을, 완성되지 못한 느낌표들을, 그대로 저장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내게 만만한 대화상대가 생겼다는 듯이 다가오는 꼬마들이 쉼없이 물어오는 질문들, 이게 모야? 그건 왜 그래?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는데? 일일이 답해주기 귀찮고 버거운, 나의 무지를 드러내야 하는 상황에 대한 분노까지 느껴지는 그런 질문들 속에 진흙속에 감춰진 사금들처럼 몇몇 빛나는 씨앗들이 들어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돌아보면 나의 어린 시절에도 그랬다.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 없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어릴 적 출판사 서적 외판원이었던 아버지가 공주시 유구읍의 어느 학교로 선생님들에게 선생님들에게 책 사라고 영업하러 가는 길에 나를 데리고 갔었다. 대여섯살 무렵이었겠다..
고등학교 때 도서관을 관리하는 도서위원으로 도서관에서 기숙하면서 부터 서고를 채운 책들의 무게에 짓눌려 책 읽는 것을 포기하고 살아온 것 같다. 도대체 그 많은 책들을 어떻게 다 소화할 수 있을까, 지레 겁먹었던 게지. 저마다 다른 관심, 한 때의 유행에 함께 휩쓸린 부박한 수다, 쓸데없는 얘기들...이겠거니 하면서 그 많은 책들을 포기했다. 더구나 세상엔 얼마나 가짜 뉴스들이 많은가? 가짜 뉴스들에 근거한 거짓된 가르침들은 오죽 많은가? 나는 나만의 관심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귀 기울여야 할 이야기를 쓰고 싶었나 보다. 그것도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놓친 이야기, 더 높이 올라가야 보이는 세상의 모습들, 나는 진실, 진리로만 가득한 글을, 쓸데 많은 글들을 쓰고 싶었나 보다..
노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엉덩이가 살이 빠져 방석없이는 앉기 힘들고, 허벅지를 만지면 뼈가 그대로 느껴지며 백골단에게 걷어채인 듯한 통증도 시시때때로 찾아온다. 모처럼 만나 앞으로 어떻게 살면 좋을지 얘기하던 아내가 정말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엉덩이와 양쪽 허벅지를 만져보고는 걱정이 되는 듯, 근손실을 예방하고 근력을 키우는 운동이라며 유투브와 블로그들을 찾아 소개해 준다. 다시 금산으로 내려오는데 무슨 반찬거리를 더해줄까 챙기는 아내 얼굴에 안타까움이 더욱 진하게 느껴진다.후원의 밤 행사에서 만난 동지들이 요즘 어떻게 지내냐며 안부를 물어오는데, 내가 진정으로 존경하는 동지들에게 건성으로 답하는게 미안해서 무어라고 답해야 할지 망설여진다.[메멘토모리]라는 제목으로 카테고리를 열고 글을 써나가며 ..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고 싶은가?막내가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미련 없이 언제든 죽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평생 중학교 도덕 선생으로 살겠다던 결심이 무너지고 실패자로 학교를 떠난 뒤에 방황하던 시절이었다.처음엔 일단 사직서를 던졌는데 아내가 혼비백산하고 주변에서 뜯어말렸다. 누님이 겨우 중재안을 제시했는데, 어머니 간병휴직을 신청해서 1년을 쉬었다가 다시 교단에 서거나 그래도 못 견디겠으면 그때 명예퇴직을 신청하는 방향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사직서가 처리되기 직전에 철회하여 간신히 모친 간병휴직으로 돌려놓았다. 그런데 그해 여름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될 무렵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휴직 사유 소멸로 곧바로 복직하고 더 없이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냈다. 결국 명퇴를 신청했다. 정년이 아직도 1..
같은 그림을 보고 서로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듯이 같은 사건을 경험한다고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그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누군가의 죽음을 함께 목도했다고 우리가 모두 한마음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말자.그러나 저마다 다른 생각,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고 해서 어떤 생각 어떤 태도든 모두가 좋은 생각, 좋은 태도라고 볼 수는 없다. 바로 이 것을 이해해야 한다. 어떤 생각 어떤 태도가 좋은가? 어떤 생각은 왜 나쁜가? 자신이 늘 가던 길대로 가고 마는 것이 아니라 가던 길을 멈추고 어느 길로 가는 게 좋을지 생각하는 그것이 중요하다.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너도 죽는다는 것을 아느냐? 이 질문은 가던 길을 멈추고 어느 길로..
교직에서 물러나온 뒤에도 한 동안 사이버교실로 운영하던 블로그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꾸준히 사람들이 찾고 있는 옛 블로그 글들 옮김]이란 카테고리를 만들어 그 곳의 글들을 이 곳에 옮겨 놓으려 한 것은 사실 남의 글 스크랩 해둔 것을 옮겨 두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고 내가 썼던 글들, 특히 사이버 교실에 올려둔 글들을 백업하자는 의도가 강력했던 것인데, 오늘 옛 블로그에 들어가니 인기글 목록에 두 번째로 올라와 있는 글이 [날마다 묵상]140904 "검을 주러 왔노라"였습니다.교직을 떠난 지 2년차에 세월호 사건을 만나고 "가만히 있으라, 기다려라" 가르쳤던 원죄를 회개하며 광장에 나갔었지요. 그 때 보수우익으로 가득한 기독교계에 답답함을 느끼면서 묵상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약 100여편의 글을 ..
우리가 경험하고 얘기할 수 있는 죽음은 오직 타인의 죽음이다. 자신의 죽음은 얘기할 수 없는 경험이다. 어쩌다 임사체험이 회자되기도 하지만 그런 종류의 이야기는 대체로 믿음의 대상이 될 이야기지 사실로 증명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보면서 어떤 감정을 갖게 되는가? 무엇을 이해하게 되는가? 그 죽음이 우리의 삶에 끼치는 변화가 있는가? 우리는 누구나 결국 죽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러한 깨달음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대학교 1,2학년 쯤이었나? 만나는 친구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다닌 적이 있었다."의사가 말하기를 앞으로 석 달 밖에 못 살 거래. 가장 뛰어난 의사를 찾아서 진단을 받았지만, 모두 너는 앞으로 석 달 밖에 못 살 거래. 너..
밥을 안 먹는다고약을 안 먹는다고변의를 고집스레 참는다고엉덩이를 꼬집어 주었어요.엄마를 아프게 꼬집어 주었어요.그러지 않아도 괜찮았는데....어차피 이렇게 훌쩍 가실 줄 알았다면차라리 그냥 편하게 가시게 놓아드렸어야 했는데...눈에는 가득 눈물을 담은 채로맑은 눈빛으로 회한을 쏟아내던 그녀는이내'꼭꼭'이란 단어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당부하고 있었다.아저씨! 제가 씩씩하게 열씸히 살아가는 모습 보이지 않으면 다그쳐 주세요.십년이나 제 모습 보아왔으니제가 다른 모습 보이면 아실 거잖아요.그녀의 등을 두드리는 '아저씨'의 손길에 무거운 사명감이 십자가처럼 얹혀 있었다.당신도 감당하지 못할 당신의 삶의 무게에 언제나 응원하고 싶었을 모녀의 애절한 이별이 얹혀 있었다.
신들도 먹고는 살았나보다. 고대 중동의 창조 설화는 신들이 놀고 먹기 위하여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신들이 당신들이 먹고 마실 것들을 손수 마련하지 않고 노예들을 부리고자 했는데, 그 노예로서 만들어진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신들이 기피하는 노동 - 벽돌을 찍어 집을 짓는 일, 성벽을 쌓는 일, 옷감을 짜는 일, ... 모든 힘든 일은 노예들을 부려먹고, 신들은 음주가무를 즐기며 놀았다는 얘기다. 고대 중동의 지배계급은 자신들을 신으로, 신의 자녀로, 신의 가족으로 자처하며, 노예들을 부리고 있었다. 신은 노예로서 인간을 창조한 것이다.그런데 당시의 노예들인 히브리들은 신이 인간을 창조한 이유를 다르게 설명했다."사람들은 어떤 존재인가, 신은 왜 인간을 창조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해 히브리들은 "..
울아버지는 우리 형제자매들에게는 무능한 가장으로서 낙인 찍힌 분이셨다.폐결핵을 앓으면서 엄니의 무한돌봄으로 겨우 몸을 추스리셨는데, 어느 정도 회복된 뒤에는 잠시 출판사 서적 외판원으로 일하시다가 다시 그 일을 그만두시고는 친구분의 복덕방에서,나중에는 경로당에서 바둑으로 세월을 보내셨다.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회복하신 뒤에는 망상에 시달리셨고, 마지막에는 요양원에 강제로 입원하게 되었고 거기서 외롭게 생을 마치셨다. 한마디로 마누라 등쳐먹고 산 한량이라 할 수 있는 삶이었다.가장 기가 막힌 일은 일찌감치 국가유공자로서 요즘으로 치면 보훈가족으로 등록하여 온갖 혜택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찢어지게 가난한 삶을 온가족이 살게 하셨다는 것이다.사진에서 보는 모습은 1950년 전쟁 직전에 찍은..